강 / 황인숙
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단호한 어조만큼이나 주제도 명확한 황인숙의 '강'이라는 시에서 화자는 외로움이나 괴로움을 나에게 말하지 말고 강에 가서 말하라고 란다. 각자의 인생에서 오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두 행에서 화자의 어조가 명령형에서 청유형으로 변하는데, 이것은 상대에 대한 독설이 화자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시의 말미에 '눈도 마주치지 말자'라는 구절을 통해 서로의 고통과 괴로움이 말로 해서 될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인간은 홀로이 각자의 삶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네이버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참고)
황인숙 시인의 '강'을 읽고 나는 뜨끔했던 건 나뿐인가. 나는 고민이나 어려움,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무조건 이야기할 사람부터 찾았다.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친한 친구와 신나게 수다 떨면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었다. 바람에 날아가 버릴 가벼운 깃털같이 고민의 무게를 줄이고 싶었나 보다. 가끔씩은 상대방이 해주는 말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고, 용기를 북돋을 수 있어서 좋았다. 힘들 때 힘들다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도 가족들 그리고 친한 지인들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서야 내 선택에 확신을 가졌다. 자아가 강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소신이 부족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 주변 사람들의 말은 꽤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런 성향이었던 나에게 사람들과의 관계는 이로운 적도 많았지만, 나의 내밀한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가십이 되어 떠돌아다녔고 어김없이 뒷말이 되어 돌아왔다. 믿고 말한 것이지 쉽게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남의 중병보다 내 손톱 밑에 낀 가시가 더 아프다'라고 몇 다리 건너면 민감한 이야기도 안주거리에 불과했다.
퇴사, 치료, 투고 등 인생에서 중요한 기로에 서 있을 때도 걱정과 염려로 포장된 나와 다른 의견을 받아 들었을 땐 쉽게 추진력을 잃기도 했다.
글로 정리하니 잘못된 게 더 잘 느껴진다. 반성한다. 내 인생을 왜 다른 사람과 열심히 의논하고, 내 인생인데 왜 남의 의견이 그렇게 중요했었는지. 선택이 잘못됐다고 누가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오롯이 나 하난데 말이다.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공유하는 것이 좋은 인간관계라고 생각했었던 게 우(愚)를 범한 원인이었다.
깊은 깨달음에는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나 사람 심리를 간파하게 된 연유도 있지만 '거울치료'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남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본인의 감정만 쏟아내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러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두고 힘들고 괴로울 때만 수시로 연락하는 사람들. '얘가 오죽하면 나한테 이럴까.' 하는 측은지심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썼지만, 자기 상황이 나아지면 어김없이 잠수를 타고 외면했다. 그래도 그건 인간적이었다. 암 수술을 위해 입원한 병원에 찾아와 본인의 힘든 이야기를 토로하며 안락사를 운운하던 지인과, 퇴원하는 날 전화해 손목을 그었다고 말하는 친구의 괴로움이 (고작) 이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다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인 게 더 허무하다.
뭘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얘기를 들어줬던가.
잠깐의 묵은 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아무나 붙잡는 것보다 차라리 대나무 숲에 들어가서 소리치는 것을 권한다.
그런 맥락에서 황인숙 작가의 '강'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든 시였다. 화자는 당신의 외로움과 괴로움, 미칠 것 같은 마음 모두 나에게 얘기하지 말고 강에게 가서 말하라고 한다. 강가에서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말자고. 지은이는 언제 이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것일까? 이 글을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긴가민가했던 내 마음에 쐐기를 박아주었을 텐데.
요즘의 나는 고민이 있거나 스트레스가 와도 사람을 찾지 않는다.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거나 마음 편히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한다. 깊은 심호흡과 함께 명상을 하고, 운동화끈 질끈 묶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걷는다. 신기하게도 새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생생히 느끼고 나면 굴레에서 벗어나 환기가 되는 느낌이다. 구름이 떠가는 모양을 보고, 눈을 들어 저 멀리 산을 바라보고. 바닷가에 살 때는 파도치는 모습을 보며 내 걱정도 물거품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상상도 해보았다.
사람보다 자연에 기대는 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작년 한 해 동안 강릉에서 지내며 내가 얻은 가장 값진 수확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잔뜩 글로 쓰고 그것을 찢어 버린다는 사람, 걱정 인형에게 이야기한다는 사람,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다는 사람 등등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달콤한 디저트를 먹거나 매운 음식, 때로는 술이 도움 될 수도 있다. 운전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차를 모는 것도 괜찮고,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인생은 괴로움의 바다라는 석가모니의 말처럼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많을 텐데 그럴 때마다 사람에게 기댈 수는 없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전이가 크기 때문에 그걸 듣는 상대방의 상황도 헤아려 봐야 한다. 물론 감정이 앞선 상황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다. 그러니 사람 말고 본인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다양한 방편들을 마련해 놓으면 좋겠다. 친구나 가족같이 소중한 사람들이 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되는 순간 서로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나는 감정의 해소 방법으로 글쓰기, 독서, 자연에 파묻히기를 택했다. 물론 영혼의 단짝인 남편과 대화도 큰 도움이 된다. 때로는 이 모든 것들로도 감당이 안 되는 힘듦이 찾아오는 게 삶이라, 그럴 때는 그냥 가만히 내 인생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게 도움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문득 무심한 마음을 바라다가도 '그래도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서 좋은 글을 써야지' 하며 현실로 돌아온다. 결국 스스로를 잘 다독이면서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