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시 / 이해인
12월의 시 / 이해인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 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들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나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 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가 행복할 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 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 날이여
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어쩌면 12월에 써야 했을 글인지도 모른다.
브런치북 <꺼내먹어요 1>을 기획했을 때 <꺼내먹어요 2>도 이미 목차가 나와있었다. 십 년 동안 필사한 노트는 이제 세 권이 되었고, 어떤 글에 어떤 에피소드를 덧붙일지도 정해놓았었다. 이미지까지 첨부해 고이 저장해 두었지만, 작년 한 해 강릉일기 브런치북을 두 편 발행하고 투고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미뤄둔 글들. 이년이라는 시간 동안 새롭게 쌓인 글감들을 덧대어 하나씩 야금야금 꺼내먹어 보려고 한다.
서울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장점 중 하나는 '빅이슈'라는 잡지를 사볼 수 있다는 거였다. 주로 시내나 지하철역에서 판매하는데, 주거취약계층의 자립을 돕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노숙인들이 직접 잡지를 판매하고, 빅이슈 판매원 소위 '빅판'이라는 이름으로 잡지 한 권당 절반의 수익을 가져간다. 나의 경우 회사생활하면서 가격이 5천 원이었을 때부터 잡지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감각적인 표지에 빳빳한 새 책을 집어 드는 느낌도 좋았지만 같은 돈으로 누군가의 자립에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돈을 쓰면서도 만족이 두 배 세배가 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빅이슈 잡지가 보이면 큰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게 되었다.
이날은 신도림역에서 약속이 있어 나온 날이었다.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해 기다리는데, 출구 한쪽에 빅판분이 보였다. 지인을 기다리면서 잡지도 읽을 겸 빅이슈를 구매했다. 한 장씩 넘기며 글을 읽는데 사이에 손글씨로 눌러쓴 편지가 끼워져 있었다. 복사본이었지만 잡지를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빅이슈 판매원의 메시지였다. 그때 그 편지에 쓰여있던 글이 이해인 수녀님의 '12월이 시'였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이 들어간 글씨가 반듯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때는 노숙인의 삶을 살았지만 자립을 위해 빅이슈 판매, 교육, 자기 계발 등에 힘쓰고 있는 빅판분의 올곧은 다짐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자기 계발서도 비슷한 내용들이 있지만 뭔가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고 담담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은 왜인지 모르게 더 와닿는 부분이 있다.
빅이슈 잡지에서 꼭꼭 눌러쓴 손글씨를 보게 되다니. 그것도 이해인 수녀님의 시와 함께. 잘은 모르지만 남들이 하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는 저 빅판분이 잘 되셔서 꼭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십 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한동안 속초에 머물렀고, 결혼 이후에는 남편을 따라 지방의 중소도시들을 철새처럼 이동하며 살았다. 가끔 병원 검진이나 친정에 올라왔을 때 길거리에서 빅이슈를 마주치면 구매하곤 했지만 판매처가 많이 줄었는지 옛날만큼 눈에 띄지는 않았다.
몇 년 전 종각역에서도 그랬다. 모처럼 빅판분이 보여서 잡지를 구매했는데 가격이 7천 원으로 올랐다는 거였다. 5천 원 주고 샀던 옛날 일만 곱씹으면서
"7천 원이요?"
너무 크게 물어서였을까. 아저씨는 멋쩍은 듯 웃으시면
"그냥 5천 원만 주세요."
라고 하셨다. 내가 그간 잡지를 사볼 기회가 없어 조금씩 올랐던 걸 몰랐을 뿐인데 말이다. 5천 원만 받으려는 아저씨에게 돈을 드리고 100미터쯤 걸어갔을까.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돌아가 제 값을 모두 치렀다. 다른 데서 아끼면 되지 이런데 아끼라고 돈 버는 건 아닐 거였다.
그리고 작년 여름 <꺼내먹어요 2>에 이 글을 넣으면서 신도림역에서 빅이슈를 판매하던 빅판분의 소식을 찾아봤다. 이렇게 정성과 진심을 담는 분이라면 어떤 정보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니 역시나! 활동하는 빅판분들 중에서도 유명하신 분이었다.
현재는 삼성역으로 자리를 옮겨 빅이슈를 판매하고 있는 문영수 님은 자립을 위해 빅이슈에서 주최하는 목공, 그림, 사진 등을 배우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동료 빅판들과 그림 전시회를 열기도 했으며, 광화문에서 '희망사진사'로 활동하기도 하셨다고 한다. 캘리그래피를 꾸준히 배워서 격주로 발행되는 빅이슈에 새로운 손편지와 시 한 편을 쓴 종이를 끼워 넣으셨다고 한다.
빅이슈 판매원들이 자립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워서 의무적으로 잡지를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며, 그분들을 위해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편지와 시를 적어서 나눠주자는 생각을 했다는 문영수 빅판님. (오마이뉴스 기사 2018.01.05 참고)
마침 출판 관련 강의를 들으러 삼성역에 갈 일이 있었고 판매원님께 잡지를 구매할 수 있었다.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반듯하고 단정한 인상이 그대로셨다.
"저 예전에 신도림역에서도 잡지 샀었어요. 그때 이해인 수녀님 시가 적혀있어서 너무 감동적이었는데, 삼성역으로 옮기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여기 볼 일 있어서 나왔다가 찾아와 봤어요. 신도림 보다 여기가 더 괜찮으세요?"
아저씨도 반가워하며 말씀을 이어갔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막 많이 팔리지는 않아요. 빅판 판매원들도 많이 줄었고요. 대신 코엑스에 큰 박람회나 행사가 있으면 좀 잘 나가고 그래요."
이 때는 장마철이라 추운 날은 아니었는데, 한 여름에도 한 겨울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아저씨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도 손 편지 기억해 주시고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 단골 직장인 분들도 있다고 하며 수줍게 웃으셨다. 담담한 말씀 뒤에 남는 애잔한 눈빛에는 먹고사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더 나은 삶을 위해서 힘쓰고 계시는 아저씨가 변함없이 계셔서 나는 한편으로 마음이 놓였다.
새로 받아 든 빅이슈에도 아저씨의 편지가 끼워져 있었다. 직접 그려 넣은 자전거 탄 곰돌이가 '빅이슈 창간 15주년'이라는 깃발을 달고 달리고 있었다. 이해인 수녀님의 '우정일기'라는 시와 함께 담은 아저씨의 사연은 이러했다.
(중략)
저는 빅이슈 판매원으로 부진을 만회하고자 새로운 일자리에 도전을 했고, 빅이슈 판매와 병행하며 조금은 고단한 여정을 걷고자 합니다. 아마도 이 편지를 쓰는 일주일 후부터는 새로운 일터에서 일을 하다가 그 일이 끝난 후 판매를 하기에 지금보다 늦은 시간에 판매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른 시간에 빅이슈를 구입하시는 독자님에게는 죄송한 일이지만 열심히 살려고 애쓴다고 생각하고 좋게 보아주시면 그것 또한 저에게 보내는 응원이라고 생각하고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후략)
- 빅이슈 삼성역 6번 (지하통로) 출구 빅판올림
빅이슈 잡지 판매 외에 다른 일을 병행할 거라는 아저씨.
한때 지하철 친구가 돼주었던 '무가지'도 다 사라지고 이제 사람들 손에는 스마트 폰만 들려있다. 전철을 타도 모두 하나같이 핸드폰만 들여다본다. 책을 보는 사람도 종이 신문을 읽는 사람도 전에 비하면 찾아보기 힘들다. 하물며 잡지라니 오죽할까.
포기하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잡지 판매와 자립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저씨가 하는 모든 일이 잘되었으면 좋겠다. 분주한 지하철 역에 서서 드문드문 오는 손님을 기다리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저씨가 적은 '12월의 시'처럼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초연히 빛나고 계시기를 바란다.
흔히 '독야청청(獨也靑靑)'이라는 말에 겨울산의 소나무를 떠올리지만, 나는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사에서 잡지 사이에 손 편지로 적은 따스한 온기를 끼워 넣고 손님을 맞는 빅이슈 판매원 아저씨가 생각난다.
모든 것이 변해도 홀로 푸른 소나무처럼, 시간이 더 흐르고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져도 따뜻한 시 한 편 적어 건넬 수 있는 마음이 선물 같은 하루였다. 빅이슈 판매원이 건넨 뜻밖의 선물에 몸도 마음도 풍성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