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를 찾아서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났다. 내가 세종을 떠나 강릉으로 이사를 간 사실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K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게 물었다.
"근데... 주문진에서 뭐 해?"
정말 궁금한 눈빛이었다. '주문진'에서와 '뭐 해' 사이에는 '도대체'가 생략돼 있다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문진에서? 주로 글 쓰고, 책 읽고, 운동도 하고, 밥 하고..."
주문진에서의 삶은 세종에서 지내던 지난 2년에 비해 활동량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었다.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출산율 1위의 부동의 도시, 나날이 인구가 유입되는 곳, 대선 후보들의 공약으로 핫 해진 바로 그 '세종시'였다. 잘 정비된 계획도시라 인프라가 좋았고, 차로 이십 분 안쪽에 모든 생활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는 걸어서 바로 세종호수공원과 이어졌기 때문에 틈만 나면 참새 방앗간처럼 나들이를 다녀오곤 했다. 정문 상가에서 위용을 뽐내던 스타벅스는 또 얼마나 컸는지 '스세권' 외에도 여러 프랜차이즈들이 입점해 있어 쾌적하고 편리한 생활이 가능했다.
이곳에서 나는 면역력 증강과 임신에 도움이 된다는 왕쑥뜸을 뜨러 매일 한의원에 다녔고, 다친 발을 재활하기 위해 필라테스에 열을 올렸다. 비 오는 날을 빼고는 언제나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를 따라 라이딩을 하고, 계절마다 아름다운 금강수목원 메타세콰이어 황톳길에서 맨발 걷기와 삼림욕으로 평화를 누렸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편안한 집에서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사실 브런치를 개설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어렵기만 했었다. 결혼 후에 몸도, 마음도, 집도 안정이 되니 매일 컴퓨터 앞에 앉으면 글이 저절로 나왔다. 식탁에 앉아 세종호수공원과 햇무리교 너머의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시간은 진정한 힐링의 날들이었다. 이따금 레만호의 분수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분수를 틀어놓을 때면 바람 따라 흩날리는 물줄기에 넋을 잃기도 했다. 안락함 속에서 느끼던 황홀한 순간들이란!
이사 온 후 가끔 적당히 바쁘고 적당히 한가했던 세종에서의 생활이 생각날 때면 나는 언제나 빈 마음으로 바다를 바라봤다.
그날은 모처럼 혼자 집 밖을 거닐고 있었다. 오월이 무르익을 무렵 창문을 타고 들어 온 아카시아 향기가 하루 종일 온 집안을 메웠다. 꽃 향기에 욕심이 나서 저녁 식사 후 운동 겸 천천히 아파트 단지를 돌아보았다.
적막했다. 다니는 차들도 없고 오가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이따금씩 보이는 길고양이들만이 내 발소리에 놀라 도망가기 바빴다. 다행히 장례식장에는 오늘 돌아가신 분이 없는지 불이 꺼져 있었다. 총총히 켜진 가로등 불빛 외에는 작은 편의점 정도가 전부였다.
'생기 있는 곳에 살고 싶다...'
불쑥 상념 하나가 떠올랐다. 멀리서 반짝이는 또 다른 아파트의 불빛을 보며 반가워서 좋아하고 있던 찰나였다. 꽃향기도 그윽하고 새소리도 싱그러웠지만 주문진의 밤은 특히 인적이 드물고 외졌다.
내 속에 이런 생각이 들어있을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들린 마음의 소리에 가장 놀란 건 나 자신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투병 생활을 위해 내려간 속초에서 4년을 살았다. 아무런 불편함과 불만이 없었다. 주문진은 분명 '강릉시'에 속해있으니까 속초보다 더 큰 도시일 거라 생각하며 별 걱정 없이 왔는데,
아뿔싸!
주문진은 그냥 주문진이었다. 관광객으로 오가며 보던 강릉(시내)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사심 가득한 표현으로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외딴섬' 같다고나 할까.
근무지 특성상 발령은 내년이나 가능하니 나는 우선 주문진에서 생기가 되는 일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젊은 도시 세종과 평균 연령 55세 (2024년 3월 기준)에 인구수 만 오천명인 주문진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아침 일찍 남편을 회사에 내려다 주고 도립대 솔밭길로 향했다. 맨발로 고운 흙을 밟으며 어싱을 했다. 사람들이 걷기 좋도록 누군가 빗자루질을 해놓은 자국을 보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주문진 건강위원회'라는 곳에서 솔밭 산책로 곳곳에 좋은 글귀들을 붙여놓아 지루하지 않게 운동할 수 있었는데 이 날은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문구와 함께 걸어둔 거울에 유독 시선이 갔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아침 일찍부터 걷기 삼매경인 나 자신을 칭찬해 주었다. 씽긋 웃어 보인 건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리고 도립대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명주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른 도서관이라 읽고 싶은 책이 한가득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대출할 책 다섯 권을 골라야 했는데, 여덟 권에서 도저히 추려지지 않았다. 아직 아침 열 시가 채 안된 시각이라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커다란 서고를 마주 보고 앉으니 고요한 사방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좋아하는 책들이 두 눈 가득이었고, 바람은 솔솔, 새소리는 한창이었다. 앞에 놓인 디퓨저 향기보다 책들이 뿜어내는 책 내음이 더 좋았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한참이 지나도 사람이 없길래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해보았다. 집에서도 들리는 새소리가 왠지 이곳에서는 더 잘 들리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곳에 모두 다 있었다. 책과 시원한 바람, 새소리 그리고 고요.
마음껏 책을 보고 뿌듯한 마음으로 도서관을 나섰다. 하루의 시작이 순조로웠다.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지경해변으로 향했다. 보아주는 이 없어도 한낮의 바다에는 금계국과 갯메꽃이 한창이었다. 향호해변까지 왕복하며 슬로 조깅을 해 볼 생각이다. 신나게 운동하기 위해 빠른 비트의 음악들을 야금야금 모아둔 것이 빛을 발한다. 이렇게 탄생한 플레이 리스트의 제목은 무려 '달려라! 이나'였다.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운동화 끈을 단단히 고쳐 메고 이어폰을 꽂았다. 재생 목록의 버튼을 누른 뒤 첫곡에는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고 두 번째 곡부터 달리기를 시작한다.
바다는 여전히 평화롭다. 매일 파도가 칠 것 같지만 의외로 파도 구경을 할 수 있는 날은 꽤 귀해서 물빛이 예쁘면 그걸로 대만족이다.
걷기와 뛰기가 주는 만족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는데, 슬로 조깅을 하고 나면 확실히 몸이 가볍고 마음은 더 산뜻해졌다. 어쩌면 '(뛰는 것을) 해냈다'는 심리적인 만족감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매일 아침 '활력 삼단 콤보'를 시행하고 들어오면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자연 식물식으로 식사를 차린다. 삶은 계란, 고구마나 감자 혹은 단호박, 핸드메이드로 만든 요거트와 통곡물 빵, 두부나 샐러드를 먹는 날도 있다.
그리고 식탁에서 바라보는 풍경에는 언제나 바다가 있었다.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바다. 전부 바다다.
'이러려고 왔지...'
안도의 한숨을 뱉는다.
주문진은 생기가 없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작 생기가 없던 것은 '내 마음'이었다. 좋아하는 일들로 채워진 간단한 루틴을 만들어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더니 금세 활력이 생겼다.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마음도 전보다 더 촉촉하고 말랑해졌다.
6개월을 살아본 바 이곳 주문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재미'가 있다. 고요함에 머무르는 시간. 어려워서 누리기 어렵다는 '안온함' 있는 곳이다. 모든 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내 인생 언제 이렇게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지금에 감사한 것도 사실이다.
따뜻해진 바람이 여름 향기를 싣고 온다. 어딘가 모르게 묵직하고 진한 바닷바람.
주문진에서 맞는 여름은 또 어떤 정취들로 가득할지 조용한 기대를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