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강릉이 낳은 천재 시인들

눈물로 시를 써도

by 윤슬log


동네 탐방을 하는 중이었다. 주문진 등대로 향하는 마을 골목 어귀에 이곳 할머니들이 쓰고 그린 시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읽다가 나는 찔끔 눈물이 났다.


'... (중략)

바다는 언제나 마음 넉넉한 부모였고

파도는 친구였어

주문진을 떠나서는 하루도 못 살아'


사실 막 이사 와서 층간 소음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주문진으로 괜히 왔다고 속상해하고 있을 때였다. 셔틀을 타더라도 강릉 시내로 갈 걸 너무 큰 모험을 했다고 자책하면서. 눈을 들면 바다가 있었지만 소음은 눈을 감고 있어도 공기처럼 존재했다.


그런 나에게 주문진은 '애증의 대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6개월이 지난 지금은 조금 다른 의미가 되었다.) 하지만 주문진이, 정말 이상하고 기이한 일들만 자꾸 일어나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곳이 다른 누군가는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었다.


삶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었다.





평생 단 한 번도 주문진을 떠나지 않고 바다 곁에서 살아온 사람들. 그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었고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사시사철 풍요로운 먹거리를 주었고 텅 빈 그물을 길어 올리는 일도 없었지만 그 넉넉한 바다에서 때론 내 소중한 가족이 영영 떠나버리기도 했다. 주문진이 삶의 모든 어르신들은 바다가 주는 고마움도, 바다의 무서움도 여실히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시를 읽어보았다. 제목부터 천천히 음미하며 읽으니 예쁘지 않은 구절이 하나도 없었다.

<바닷가에 사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주문리>, <참 예쁜 세상>...


할머니들의 시에는 어려운 단어가 없었다. 형이상학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은유와 비유, 난해한 상징의 표현들도 없었다. 여러 번 곱씹고 고개를 갸웃하는 일도 없이 누구나 읽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오징어를 찢으며 자식들을 키웠다는 어르신, 때로는 엄마 품 같고 때로는 악마의 입속 같은 두 얼굴의 바다에게 내 아이들은 나처럼 거친 일 겪는 일 없이 그저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손을 모으는 어르신의 모습도 파도처럼 어른거렸다.





사실 처음 지은 이 글의 제목은 <주문진의 시인들>이었다. 제목을 변경한 데에는 강릉 곳곳에서 훌륭한 작가들을 더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그날은 5월의 첫째 주로 허난설헌 문화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서울에 볼 일이 있어서 올라가기 전에 강릉 시내에 들러 식사를 했고, 집을 떠나는 날에만 먹을 수 있다는 그 귀한 커피를 사 먹었다. 달디 단 맛을 아껴 마시며 남편과 나는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으로 향했다. 소화도 시킬 겸 솔숲 한 바퀴를 걸어 볼 생각이었다.


평소보다 차도 관광객들도 많아서 살펴보니 무려 6일이라는 긴 일정으로 '난설헌 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 프로그램, 강연, 백일장, 음악회 등 다채로운 행사들 사이에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허난설헌의 생가터에 전시된 '성인 문해교실 시화전'이었다.


별생각 없이 액자에 담긴 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남편과 나는 오열을 하다 못해 통곡에 이르렀다. 우리 둘 다 잠기지 않는 수도꼭지를 어르고 달래듯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기에 여념이 없었다.


처음 눈물샘을 터트리게 된 것은 김선기 할머니의 <그리운 우리 영감님>이라는 시를 읽으면서였다. 시는 문외한이지만, 그저 순수하고 열렬한 마음 하나로 시와 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어떤 글을 읽고 나서 그것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그려진다면 틀림없이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정지용의 <향수>나 박완서의 <그 여자네 집>처럼 말이다.


추운 날 더운 날 가리지 않고 문해교실에 데려다주던 영감님이 벼락같이 떠나고 나서

"우리 영감 최고!"라고 속으로만 되뇌었던 칭찬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는 할머니.


그 전날 결혼 이후 처음으로 남편과 크게 싸운 터라 이 시가 더 애틋하게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시의 마지막 구절이 하도 좋아 읽고 또 읽으며 눈물을 훔쳤다. 남편은 이미 돌아서 안 운 것처럼 어슬렁 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안다. 벌써 촉촉해졌을 그의 소매를.




꽤 많은 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보통 이런 시화전에서는 눈길을 사로잡는 한 두 작품 빼고는 대게 스쳐 지나가면서 읽게 되는 것들이 많은데, 이곳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르신들이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글들이 모두 바다처럼 푸르고 소나무 숲처럼 향기로웠다.


칠십, 팔십이 넘은 나이에 처음 글자를 배우고, 본인의 이름을 쓰고, 시를 쓴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모두들 하나같이 내 인생의 봄날은 '지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월은 왜 이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나는 나이를 먹는 것이 싫은데

왜냐하면 무엇이든 들으면

금방 잊어먹으니 한심하기 때문입니다.

... (중략)

선생님이 시를 한편 써 오라 했는데

문을 열고 밤하늘을 쳐다봐도 생각이 안 납니다.

시도 편지도 못 썼지만 여덟 살 애기처럼

내일 또 학교 갈 생각 하니 즐겁습니다.'


김선기 할머니의 글을 보니 엄마가 생각났다. 나이 들어서 생각이 안 나고 행동이 굼떠지는 게 슬펐는지 엄마도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자꾸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이지만 막상 겪어보면 서글플 것 같았다.


'선생님 세월이 참 좋아졌습니다.'

라는 시작이 인상적인 조옥녀 할머니의 시도, 내 마음은 공부가 소원이라 팔십에 시작한 공부로 밤하늘 반짝이는 별처럼 소원을 이루었다는 이봉춘 어르신의 글도.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나가는 발걸음으로 이곳에 들른 사람들 모두 오랜 시간 시 앞에 머물며 읽고 또 읽고 있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새벽에 홀로 일어나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할머니들의 시를 가만히 읽으니 또 눈물이 난다. 한 편의 시를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을지. 가슴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말들과 무수한 감정의 덩어리들을 깎고 다듬으며 밤을 지새우셨을 어르신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룩함이란 이런 걸까.


요즘이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칠십, 팔십이라는 나이는 인생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노년기라고 하기에 이견이 없다. 우리가 태어나서 배우는 글자를 어르신들은 생의 말년이 되어서 익히면서도 '배우는 기쁨'과 '알아가는 행복'이 더 크다고 했다.


내 이름 석자를 쓸 수 있고, 버스 정류장에서 어디 가는 버스인지 알고 탈 수 있고, 사랑하는 딸에게 그리운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으니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는 그분들의 시를 읽으며 너무 많이 배운 것이 함정이 되는 지금 이 세상을 돌아보았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에 대학 진학은 지극히 당연하고, 그것도 모자라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다른 나라의 언어도 몇 개씩 배울 수 있는 시대가 생소하지 않은데 불과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학업을 이어 나가는 것도 여자가 글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같이 녹록지 않았다.

어르신의 말 맞다나 세월이 좋아지긴 한 모양이다.


누군가는 '강릉이 낳은 천재 시인'으로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을 꼽지만, 삶의 연륜과 지혜가 묻어나는 언어로 오늘도 내일도 글쓰기에 골몰하고 계실 어르신들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많이 배우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마음을 움직이는 문자들이 있다는 것을 이곳 강릉에 와서 깨닫는다.

keyword
이전 19화항구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