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자리 새 자리
강릉에 내려와 살면서 잘 느껴지는 정서가 있다면 계절마다 피는 꽃의 향연과 새들의 노랫소리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나만 느끼는 생각인가 했는데, 얼마 전 명상 수업을 함께 듣는 분께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강릉에 이사 온 후로는 철 따라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꽃들이 피어나는지 몰랐다고. 꽃들이 유난히 더 잘 보이는 것 같다고. 매화에도 향기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면서 그녀는 꽃같이 웃었다.
이른 봄 개나리를 시작으로 매화, 벚꽃, 복숭아꽃이 꽃을 피운다.
경포호에서는 대대적인 벚꽃 축제가 열리는데 경포호수와 생태저류지 부근으로 연분홍 벚꽃 나무들이 꽃대궐을 이룬다. 벚꽃의 절정도 아름답지만 나는 '벚꽃 엔딩'이라는 노래 제목처럼 꽃잎이 처연하게 날리는 벚꽃의 마지막 순간을 사랑한다.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면 바람이 불 때마다 사방에서 꽃들이 내게 쏟아져 마치 꽃잎 샤워를 하는 듯한 기분이다. 기쁜 날 축하자리를 빛내는 꽃가루처럼 축복의 세례를 받는 느낌이랄까.
아름다워서 더 찰나 같은 벚꽃이 졌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벚꽃 나무가 모든 꽃잎을 떨구면 알록달록한 철쭉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해변을 따라 심어놓은 유채꽃은 바다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사진 찍을 풍경 하나를 더 선물하고, 유채밭에서 <폭삭 속았수다>의 주인공이 돼 보기도 한다.
이맘때쯤 강릉의 '허균 허난설헌 생가'에 가면 겹벚꽃과 철쭉의 환상의 콜라보를 감상할 수 있다. 고즈넉한 기와집 뒤뜰에 핀 예쁜 꽃들은 장독대, 아궁이의 굴뚝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아파트 생활이 익숙한 나지만 정원이 아름다운 이맘 때는 이런 한옥집에 살면서 꽃나무를 감상하는 게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랑이 노래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의 주인공인 모란도 마당 한쪽에 고고한 자태로 꽃을 피웠다. 전라도 강진에서 열린 '영랑 백일장'에 참가했을 때 영랑의 생가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모란꽃을 본 적이 있다. 도심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꽃이어서 그런지 강렬한 색감과 그윽한 향기에 취해 그의 시를 몇 번이고 읊조리던 기억이 있다. 그 반가운 꽃을 강릉에서도 만날 수 있다니 마치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5월은 꽃향기가 진한 꽃들이 앞다투어 개화한다. 매혹적인 보랏빛을 뽐내는 등나무꽃, 길가에 먼 산에 피어있는 아카시아 향기는 온 집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풍성하다. 어릴 때도 아카시아 향이 나는 껌을 좋아했던 나는 천연 아카시아 꽃의 향기가 이렇게 좋은지,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을 주문진에 와서 알았다. 찻길을 달리다 보면 먼산 언덕 위에 총총히 달려있는 아카시아 꽃만 먼발치에서 보았을 뿐이었는데, 여기서는 강원도립대 솔밭길 안에 키가 낮은 아카시아 꽃이 있어 사진도 찍고, 향기도 즐기며 흡족하게 시간을 보냈다.
바다에서도 꽃 잔치가 한창이다. 범인은 해당화다. 해당화는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범인이다. 꽃향기에서 영감을 받은 향수들이 많지만 화학적인 성분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향기를 똑같이 재현하기란 어렵다. 언제가 기술이 많이 발전한다면 아름답고 고혹적인 해당화의 향을 그대로 담은 향수가 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기꺼이 충성 고객이 되어 아주 오랫동안 그 향을 즐겨 사용할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해당화 향이 이토록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청량한 바다 내음과 그 푸른 배경과 함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해당화와 함께 금계국, 갯메꽃, 낮달이 꽃도 초여름 분주하게 꽃망울을 틔운다. 경포호수 주변에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꽃말을 가진 양귀비꽃도 한가득이다. 금계국이 한들한들 코스모스처럼 흔들리고 아름다운 여인을 닮은 양귀비도 낭창낭창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 여름이 시작될 무렵 경포의 풍경이다.
대궐 밖 조선에서 가장 큰 집이라는 강릉 '선교장'에는 데이지와 엉겅퀴 꽃을 볼 수 있었다. 이맘때 강릉은 정말 어디 가나 꽃길이다.
계절의 여왕 5월을 상징하는 장미는 이미 여왕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명상 수업이 끝나면 강릉 시내를 가로지르는 남대천을 따라 산책을 하고 돌아오곤 했는데 강변에 장미꽃이 가득했다. 붉은 장미와 노란 장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평범한 일상에 비범한 풍경을 선물한다.
5월 말 남대천 일대에서 열린 강릉 단오제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숨은 공신이 어쩌면 이 근사한 '장미꽃' 아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는 단단히 한몫했을 것 같다.
녹음이 짙어질수록 다양한 꽃과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산딸나무는 내게 있어 6월의 첫 손님으로, 서양에서는 예수가 로마군들에게 처형될 때 십자가로 쓰인 나무가 산딸나무였다고 알려져 기독교인들이 특히 사랑하는 수종이 되었다고 한다. 그 꽃도 순백의 하얀 십자가 모양이라 신기했다.
비교적 익숙한 쥐똥나무 향기도 거리 곳곳에서 맡을 수 있고, 시골 담벼락과 모퉁이마다 정승처럼 우뚝 솟아있는 접시꽃도 운치 있었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 보면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일구시는 한 뙤기의 밭과 낮은 빌라가 있다. 이른 아침부터 밭에 앉아 부지런히 작물을 일구시는 어르신들 너머로 키가 큰 접시꽃이 보디가드처럼 서 있었다. 어둑한 밤이라고 한다면 어르신들 무탈하게 일하시라고 주변을 환히 비추는 가로등 역할도 해줬을 것 같이 친절하다. 한껏 낮아진 사람과 하늘 향해 한껏 꽃대를 올린 넉넉한 접시꽃이 귀여운 풍경을 만들었다.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물인 '감자'에도 꽃이 있는 줄 서울 촌놈은 마흔 줄에 새로운 지식 하나를 얻었다. 강릉 시내로 나가는 길 7번 국도를 신나게 달리다 보면 대관령 자락 아래로 펼쳐진 밭에 굵은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은 하얀 꽃이 천지였다.
'저건 무슨 꽃이지?'
꽃밭은 아니니 분명 밭에서 나는 작물일 텐데 처음 본 꽃이었다. 정답은 감자꽃. 감자나 고구마는 흙에서 파내 먹는다고만 생각했지 잎이 저리 무성하고, 꽃도 한가득 일지는 미처 몰랐었다. 글을 쓰다가
'설마 고구마에는 꽃이 없겠지.'
싶어 찾아본 고구마 꽃의 존재에, 어디 가서 꽃 좀 안다고 이야기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해 본다.
어제는 주문진성당 뒷마당에서 석류꽃과 섬초롱, 왜철쭉을 발견했다. 성당에 와도 뒷마당까지는 와볼 일이 없었는데, 그늘진 주차 공간을 찾아 성당 위쪽까지 올라온 것이 처음 본 꽃들을 만난 계기가 되었다.
여름이 깊어가고 서서히 밤꽃 냄새가 날린다. 내가 사랑하는 여름 꽃 능소화가 한옥 담벼락을 가득 메우겠지. 탐스러운 수국은 강릉 솔향수목원과 수국으로 유명한 정원 카페에 가서 볼 생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방동리 무궁화'와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가시연꽃을 보는 것이다.
방동리 무궁화의 경우 무궁화의 일반적인 수명이 40~50년임에도 불구하고, 수령이 100년이 넘고 나무의 둘레가 146cm나 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무궁화 중 가장 굵으며 꽃이 홍단심계로 순수 재래종의 원형을 보유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고 한다. 가시연은 밤에 오므렸다가 오전에 활짝 핀다고 하는데 늘 그때를 잘 못 맞춰 와서 한 번을 본 적이 없었다. 올해는 가시연이 필 시기가 되면 아침 일찍 출근 도장을 찍어봐야겠다.
주문진에 살며 꽃처럼 많이 본 것이 바로 '새'다.
서울에 살며 까지, 참새, 비둘기가 익숙했다면 이곳은 제비, 갈매기, 가마우지, 왜가리 그리고 각종 철새들이 가득하다. 특히 너무 빨라서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제비가 정말 많다.
강릉 시내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주문진에는 제비가 참새보다 많은 것은 확실하다. 주차장에도, 주문진 수산시장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제비들이 밤낮없이 지저귀며 창공을 가른다. 얼마나 용감무쌍한지 사람 아주 가까이에서도 비행을 하는데, 꼭 같이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내내 정신없이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기분 나쁜 분주함은 아니었지만 모처럼 나간 밤마실에서 제비들이 하도 쫓아와 침을 한번 꿀꺽 삼킨 것도 사실이다.
경포호 바위에 앉아 날개를 말리는 가마우지, 한낮에 바다 위에서 모래사장에서 쉬는 갈매기, 노을질 무렵 호숫가에 모여 하루를 마감하는 철새들, 오색딱따구리와 이름 모를 새들이 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변함없이 싱그럽다.
매일 아침 환기하려고 창문을 열 때면 이미 새들은 노래에 화음을 넣고 있다. 도서관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맑고 청아한 새들의 지저귐이 가득하다. 좋은 날이다. 그저 그런 날도 좋은 날이 되도록 새들이 격려해 주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내가 오래 아팠기 때문에 자연을 좋아하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암에 걸리기 전에도 꽃꽂이 선생님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매주 집안에서 다른 꽃들을 감상할 수 있었고, 꽃 이름이나 꽃말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동식물을 좋아했음은 두 말하려니 입이 아파온다.
투병생활은 그저 '자연에 머무를 때 몸과 마음 모두 확실히 편안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던 경험이었다.
나는 그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좋아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꽃나무와 새들의 노랫소리를 즐기고 있다. 내 안의 모든 기쁨이 꽃처럼 만개하고, 내가 수집한 작은 행복들이 천진난만한 새들의 노래처럼 즐거운 환호성이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