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문화원 <황동규 시인 초청강연>을 듣고
강릉문화원 홈페이지를 둘러보다가 황동규 시인 초정강연이 열린다는 글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 <즐거운 편지>의 작가이자 서정 문학의 진수 <소나기>를 쓴 황순원씨의 아들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교내에서 열리는 명사초청 강연에 부지런히 참석했다. 연예인, 기업가, 작가, 번역가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성공 뒤에는 온갖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스토리가 숨어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나도 재밌어서 강의 시간이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남아 특별 강연을 듣곤 했다.
강릉에서 황동규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니. 나는 망설임 없이 신청하고 강의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강릉문화원으로 향했다. 이미 객석에는 많은 분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주최 측에서 나누어준 강의 자료를 받아 들고 자리를 잡았다. 삼삼오오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고, 강릉의 바다를 닮은 푸른 재킷을 입은 노신사 한 분이 연단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 어머."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림이 들렸다. 나도 속으로 놀랬다.
'와...'
하는 탄성이 마음에 울렸다. 아마 본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연로한 시인의 모습이 다들 짐짓 놀란 것 같았다.
황시인은 관계자들의 안내에 따라 단상이 보이는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천천히 걸어 강단으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제가 한 오 년만 일찍 왔어도 서서 강의를 했을 텐데, 지금은 척추협착증 때문에 부득이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시인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88세라는 나이가 시인을 작고 왜소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가 지닌 총기와 비범함은 세월이 가져갈 수 없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본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강릉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하셨다. 오래전부터 은퇴하면 서울을 떠나 '강릉'에 와서 살겠노라 생각하셨다고 한다. 푸른 산과 파란 동해바다, 대관령 굽이의 신선한 산채와 초당 두부, 해산물이 풍부한 곳. 한국에 이런 곳이 따로 없다며 우리나라에서 크기가 알맞고, 가장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었고, 문학은 '체험'에서 출발한다는 선생님의 말처럼 본인이 살면서 겪었던 경험들을 토대로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들이 어떻게 쓰였는지 설명해 주셨다.
참고로 이번 강의에는 부제가 있었는데 단순히 '황동규 시인 초청강연'이 아닌 <아픔의 체험은 삶의 힘>이라는 제목이었다. 작가님의 삶에는 또 아픔이 깃들어 있을지, 그리고 그 아픔을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승화할 수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마음의 아픔이나 몸의 아픔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상황이다. 가능한 피하고 싶지만 일단 맞닥뜨린 아픔은 피할수록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답하기 힘든 물음이지만, 자신의 가장 큰 아픔을 가지고 다음에 만나게 되는 아픔들을 눅이는 방법이 있다고 시인은 말했다.
6.25 피난 때 내려간 부산에서 작가는 아버지를 도와 장사를 했다고 한다. 초등학생이었던 황시인과 그의 동생이 서면의 미군 부대에 가서 담배, 초콜릿, 깡통 등을 사가지고 광복동 시장에 와서 파는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부친인 황순원 작가의 단편소설 <곡예사>에도 그 생활 일부가 등장한다고 했다.
당시 전차값을 아끼려 지나가는 트럭에 공짜로 올라타 길을 오고 갔는데, 어느 날 동생 손을 잡고 막 트럭에 오르려던 찰나에 차가 출발해 그 상태로 몇 km를 매달려 갔던 일을 겪게 된다. 하도 고통스럽고 위험한 사건이어서 부모님께도 알리지 못했고, 한동안 꿈처럼 재생되어 시인을 괴롭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은 몇 후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일을 떠올리며 '그때도 견뎠는데 이것쯤이야.' 하고 아픔을 이겨내는 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시 <즐거운 편지>에는 사랑의 마음을 '사소한'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랑에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고3 때 쓴 이 시의 핵심인 짝사랑의 아픔은 격렬했다고 한다.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어린 나이에 어떻게 사랑을 사소하다고 표현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했는데, 그 낱말을 시에 쓰게 된 이유도 어린 시절 생계를 위해 장사하며 트럭에 매달려 갔던 아픔에 비할 때 '사소함'으로 바꿀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픔은 상대적인 것이다. 크나큰 아픔을 한 번 겪고 나면 그 후 인생에서 오는 작은 시련들은 비교적 담담하게 맞을 수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인에게는 어린 시절 질주하는 트럭에 매달려 한참을 내달렸던 기억이 가장 무서운 공포였으리라.
<즐거운 편지> 외에도 지인의 자살 소식을 듣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해 쓴 <조그만 사랑 노래>, 귀 수술 후 얼굴 한쪽이 마비될 수 있다는 엄청난 선고를 받고 밤을 새운 괴로움 속에서 쓴 <퇴원 날 저녁>이라는 시, <비문>이라는 시를 읽으면서는 비문증에 시달리던 스스로에게 "날건 말건!" 하는 말로 넘길 수 있었다는 일화도 들려주셨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날벌레 같은 형상들이 신경 쓰이고 방해가 됐지만 신경 쓰지 말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후에는 정말 괜찮았다는 거였다.
시인은 고통과 괴로움을 통해 얻은 경험들을 시로 쓴 이야기를 하며 몇 번이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삶은 분명 힘들지만 '이것도 이겼는데,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나는 할 수 있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대하면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위기와 아픔은 피한다고 해서 절대 피해지지 않으며 피할수록 더 진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강의를 듣고 있는 우리 또한 내 삶의 가장 아픈 추억이 새 아픔이나 위기를 만났을 때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고, 나아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도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이야기하셨다.
강의를 다 듣고 나니 '극복'이라는 키워드가 나에게 남았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은 역시 '암'이었는데, 암을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기도 했지만 적당히 '시간이 약이다. 다 지나간다.' 하면서 버틴 시간도 있었다. 삶의 고난에는 '극복'과 '받아들임'이 둘 다 필요한 것 같았다.
애송시 <즐거운 편지>처럼 말랑하고 서정적인 문학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두 주먹 불끈 쥐고 열성적으로 삶의 아픔과 극복을 말하던 황동규 시인의 모습은 나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
강의가 끝난 후 황동규 시인에게 직접 질문할 기회가 주어져 "글쓰기의 영감은 어디서 받는지"를 여쭈었고, 사인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인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보다가 십 년 전 매일경제에 실린 선생님의 인터뷰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그는 특히 책을 읽더라도 행복해지는 책은 가능하면 안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행복하게 산다는 게 상당 부분 날 위해 산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아름답게 사는 것을 읽어라. 죽을 때도 아름답게 죽는 게 훨씬 편할 것이다. 행복하게 죽는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 행복은 죽음까지 포함하지 못한다.”
행복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욕심이라는 얘기다.
나는 항상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행복이 지상 최고의 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 태어난 거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름다운 삶'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난의 극복과 내려놓음."
"행복한 삶과 아름다운 삶."
노시인이 던져준 인생의 중요한 화두를 몇 번이고 되뇌며 나는 조용히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