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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아침

새로운 세상 속으로

by 윤슬log


슬로우 조깅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3주가 되었다. 보통 차 없이 해안길이 펼쳐진 지경해변과 주문진 방파제를 번갈아 가면서 뛰는데 지난주에는 방파제에서만 달렸다.


집에서 주문진 방파제까지는 도보로 15분이 걸린다. 반원형의 주문진 항구를 통과해야만이 운동을 시작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몸과 마음을 깨우고 세안을 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방파제로 향했다.


방파제 길은 왼쪽은 주문진 해수교환장치가 있는 망망대해의 동해바다, 오른쪽은 주문진 항구로 이루어져 바닷바람이 시원했고 숨 쉬는 데 거치는 것이 없었다. 가끔 배들이 드나들곤 했지만 차가 달리는 것보다는 드문 풍경이어서 그런지 작은 고깃배가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는 볼을 부풀려 잠시 숨을 참고 넘겼다. 바다라서 이런 것도 너그러워지는 걸까? 통통배가 가는 모습을 보면 마냥 신기하고 재밌었다.


바닥도 우레탄 고무로 재질로 잘 정비되어 있어 뛰는 데 부담이 없었다. 그늘은 없었지만 그래도 30분 바짝 뛰고 들어가기 때문에 이 정도면 초보 러너에게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물통을 내려놓고 준비운동을 시작하는데 눈에 들어온 풍경이 낯설었다. 큰 트럭이 한쪽에 서있고 컨베이어 벨트를 닮은 기구가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걸음을 멈춰서 자세히 살펴보니 한 무리의 작업자들이 바다에서 막 따온 멍게를 선별하고 있었다. 그물에서는 바다의 심장 같은 뻘건 멍게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간단히 세척하고 나누어 물차에 싣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시계에 손이 갔다.

'9시?'

아직 아홉 시도 안 된 시간이다.

이 시간에 방파제에 누가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항구는 활기찼다.


눈을 들어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미 조업을 마친 배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처럼 항구로, 항구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제 막 조업을 나가는 배들도 보였다.

운동하러 나오지 않았다면 집에서 훔치럭대고 있었을 시간이었을 텐데 시골의 아침은 정말 일찍 시작되는 것 같다. 사실 주문진은 단순히 '시골'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는 조금 애매하다. 이곳은 전형적인 동해안의 어촌 마을로 큰 회사나 대규모 산업단지는 없지만 자연 그대로의 바다 그리고 논밭에서 치열한 삶의 현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가끔 새벽에 깨어 화장실을 다녀올 적에도 바다 위에서 반짝이는 배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요즘이 한창 오징어 난전이 개장했다는 글을 보았는데, 오징어 잡이 배였을까. 수산업에는 문외한인 나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모르는 새에,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 이곳 주문진의 시계였다.





나는 붉은빛 펄떡이며 올라오는 멍게가 신기해서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한참 후에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은 이어폰을 한쪽만 하고 천천히 달리기로 했다. 바다가 내는 소리와 배들이 드나들며 나는 소음들을 조금 더 생생하게 느껴보고 싶었다.


앞에 작은 태극기를 꽂은 배들이 부지런히 바다로 나가고 또 항구의 품에 들어와 안겼다. 발은 부지런히 뛰고 있었지만 시선은 항구로 향하는 배들에게 가있었다. 사람이 몇 명이나 탔는지, 오늘 잡아 올린 고기는 무엇인지가 궁금했지만 방파제 위에서는 그것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뱃고동 소리가 났고 가끔씩은 배가 뿜어내는 연기가 구수했다. 꼭 누군가 나와 함께 달리고 있는 것 같아 신나고 든든했다.


지루하지 않게 운동을 마쳤다. 그리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천천히 항구를 둘러보기로 했다. 시계는 여전히 아홉 시와 열 시 사이에서 맴돌고 있었다. 분주히 오가는 고기잡이 배와 그물을 내리는 어부들, 멍게를 수확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뒤쪽으로는 노인 한 분이 의자에 앉아 그물을 기우고 있었다. 고기를 잡는 시간보다 그물 손질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이유도, 수확만큼이나 어구 손질이 중요한 이유도 노인의 정성 어린 손길에서 다 느껴졌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방해가 될 것 같아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항구 깊숙한 곳에서 나와 어시장 쪽으로 향하니 조업을 막 마치고 돌아온 배들이 더 많이 보였다. 캡모자에 후드티 여느 어부들과는 조금 다른 복장에 시선이 갔다. 그는 외국에서 온 젊은 노동자였다. 야리야리한 팔과 다리를 잔뜩 웅크리고 갑판 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의 귀에서도 이어폰이 보였다. 어떤 연유로 이 먼 땅에 와서 배를 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 나라말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잠시라도 그가 고된 땀을 식힐 수 있기를 바랐다.


새벽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배들이 유난히 많아서일까. 검게 그을린 주름진 어르신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배 위에서, 항구에서 쉬고 계셨다.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장화, 짠내 가득한 바다 향기, 곳곳에서 날리는 담배 냄새들. 아낙들은 어렵게 딴 미역을 난간에 널고 있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그물을 손질하는 털북숭이 젊은 어부의 모습도 보였다. 클래식 라디오 소리가 너무 좋아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누군가 꽤나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물을 기우고 있었다. 낭만이었다.


많은 분들이 항구 한쪽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정직한 육체노동 이후 마주하는 한 끼 밥상은 얼마나 달고 맛있을지. 밥 먹는 데 쳐다보면 불편할 수가 있으니 나름대로 최대한 안 본 체하며 유유히 항구를 빠져나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였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곳이 마흔을 앞둔 내 세상의 다였다.


나에게 익숙한 출근길은 잘 갖춰진 슈트에 한 손에는 커피 한 잔, 회사 출입 카드를 목에 멘 여의도와 광화문의 모습이었다. 나도 매일 그런 모습으로 출근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경쾌하게 내며 도도하고 당당하게 서울 시내를 누볐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요이 땅!' 하는 소리 없이도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 언제나 인파로 가득했던 출근길 만원 버스의 냄새... 길어진 투병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신기하게도 이런 풍경들이 그리웠다.


하지만 주문진의 출근길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른 새벽 조업을 시작해 매일 한결같이 그물을 올리고 내리는 사람들. 그들은 자연이 주는 양식에 감사하며 천재지변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바람과 파도를 견디며 아이들을 키워낸다.

서울에 있을 때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항구의 아침이었다. 가끔 놀러 오면 수산시장에 들러 생선이나 젓갈 등을 사 먹기만 했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내 입으로 들어가는지 별로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 그런 내게 요즘 슬로우 조깅을 할 때마다 펼쳐지는 주문진항의 모습은 늘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남편을 따라 여기저기 이동하는 삶은 재밌기도 했지만, 때로는 적응이 필요했고 더러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늘 아무런 인연도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주문진 항구의 풍경들은 매일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감정, 몰랐던 세계를 알려준다.

앞으로 나는 지구 위 어느 곳에서 어떤 만남을 하게 될까? 어떤 풍경과 조우하며 무엇을 느끼게 될지 기대가 된다. 그리고 내가 알게 된 새로운 세상들을 따뜻한 시선과 사람 냄새나는 글로 풀어낼 것이다. 그저 지금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의 원(願)이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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