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이루어지는 중
한 해도 빠짐없이 다이어리에 적었던 올해의 목표 1번은 언제나 '살 빼기'였다. -3kg, -5kg 어떤 때는 야무지게 -10kg을 적어놓은 적도 있었다.
현재 나는 표준 체중에 속하고 십 대 때 몸무게와도 별반 차이가 없지만(너무 똑같은 게 문제일 수도) 주문진으로 이사 온 후 불규칙한 식습관에 야금야금 살이 붙더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전에는 조금 먹고 운동하면 삼사 킬로는 금방 빠졌는데 요즘은 진짜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느낌이랄까. 그나마 어렵게 뺀 살도 일 년 이년 지나면 어김없이 원래의 몸무게로 회귀했다.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이 맨 위에 공란에 반, 번호, 성명을 쓰는 것처럼 올해도 큰 고민 없이 2025년 목표 1번으로 '다이어트'를 적어두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잊어버렸다.
나쁜 거 안 먹고, 먹는 양 줄이고, 매일 열심히 걸으면 빠질 줄 알았던 살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이따금 올라가던 저울이 무서워 요즘은 본체도 안 하고 있었는데, 여름이 다가오니 본격적으로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떠올린 게 '슬로우 조깅'이었다. 작년에는 세종에서 맨발 걷기, 공유 자전거로 세종 호수 돌기, 꾸준히 필라테스를 다니며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운동들을 했지만 주문진에서는 어씽, 걷기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안보였다. 자전거를 타거나 운동 수업에 참여하려면 차를 타고 강릉 시내로 왕복 40~45분 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저 멀리 산은 많았지만 내가 올라갈 수 있을만한 산인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몇 년 전 계단에서 미끄러져 발등 두 군데가 금이갔다. 깁스하고, 침을 맞으러 다니고, 재활목적으로 필라테스를 배웠다. 다 나았다고 생각했지만 성치 않은 발로 러닝 머신을 타니 이번에는 무릎에 신호가 왔다.
결국 아무래도 뛰는 건 나에게 무리라는 생각만 더욱 공고해졌다. 다시 뛰어보려고 마음먹는 것도 힘들었지만, 첫 한 걸음 내딛는 것이 겁나서 망설이던 시간이 유난히 길었다.
하지만 슬로우 조깅에 관한 다큐와 관련 정보들을 찾아본 후 내가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큰 마음을 한 번 먹고 결심했다. 조각처럼 아로새기던 문제의 버킷리스트를 시행해 보기로.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운동. 저혈압과 발등 골절 이슈로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바로 그 '달리기'를 해보기로 말이다.
나는 운동화끈을 질끈 묶고 지경해변으로 향했다. 내리쬐는 태양은 뜨거웠지만 바다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덥지는 않았다.
'후-하 후-하'
천천히 숨을 고르고 발목을 돌렸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후 심장소리와 비트가 맞는 신나는 노래를 틀었다. 수많은 플레이리스트 중 나의 슬로우 조깅 템포에 가장 알맞은 노래는 데이식스의 'HAPPY'와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였다. 비트가 더 빠른 노래는 마음이 앞섰고, 너무 느린 노래는 박자감이 없어 흥이 나지 않았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둠칫 둠칫 심장 박동을 고조시켰다. 용기를 내어 첫 발을 떼보았다. '슬로우 조깅'이라는 말 그대로 천천히 앞발로 착지한다는 느낌으로 시작하면 된다. 멀리서 보면 종종걸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분명 달리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호흡을 유지하며 달릴 수 있는 것이 좋았고 오버 페이스를 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웠다.
파노라마처럼 바다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척박했던 모래사장 위에 해당화가 자줏빛 수를 놓고 있었다. 그윽한 향기에 취해 달리니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해당화 향을 가장 좋아하는 나는 항상 '이 향기를 향수로 만들어 갖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해당화 꽃내음에 고무되어 성공적으로 첫 슬로우 조깅을 마쳤다.
도립대 솔밭길에서도, 오늘 아침 주문진 방파제에서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천천히 달리고 있다.
운동 전후로 스트레칭만 잘하면 근육에도 무리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무들이 가득한 곳에서는 아카시아 향기가, 바다에서는 해당화 향이 가득해서 꽃향기에 취해 달리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꽃처럼 나도 생생히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달리다 보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경쾌한 느낌이 드는 것을 '러너스 하이'라고 하는데 슬로우 조깅만으로도 러닝 하이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부상 없이 꾸준히 뛸 수 있어서 나에게는 잘 맞는 운동이었다. 슬로우 조깅을 시작한 지 이 주째. 2kg가 빠졌다. 걷기에 비해서는 괄목할만할 감량 효과였다. 아무래도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던 운동이다 보니 몸이 반응하는 것 같기도 하다.
뭐가 됐든 체력 증진과 체중 감량, 심폐기능 향상 및 마음 근육 발달에도 두루두루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주문진에 있는 동안 어씽과 슬로우 조깅을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아직 목표를 다 이룬 것은 아니지만 슬로우 조깅을 시작하며 버킷리스트 두 가지를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 '달리기'와 '살 빼기'.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게는 선뜻 도전하고 이뤄내기 어려웠던 꿈이었다.
창문을 열면 산에서 내려온 아카시아 꽃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다. 지척에 있는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해당화 향기가 진동을 한다. 달큰한 꽃내음만으로도 오월은 이미 충분히 좋은 계절이다.
화창한 봄날을 천천히 달리며 두려움을 없애고 싶다. 작은 일이지만 하나씩 도전하며 소소한 꿈들을 이뤄나갈 것이다.
그 꿈에서는 늘 아카시아 꽃내음과 해당화 향기가 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