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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한창

2025. 11. 11 (목)

by 윤슬log

언제가 마지막 일기였더라. 아마득하다.

매일 쓰는 걸 목표로 했었는데... 나에게 글쓰기는 '마음의 여유' 보다는 '시간적 여유'에 달린 일인가 보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인가 싶은 나는 요즘 10시~10시 30분에 취침을 해 7시간 남짓을 숙면하고 6시에 일어난다. 아직 동도 트기 전 캄캄한 새벽이다. 남편이 깰세라 살금살금 주방으로 나와 공복에 먹는 영양제를 먹고, 불을 올린다. 하루는 현미차, 하루는 보리차로 번갈아 가면서 음용수를 데운다. 현미(따뜻한 성질)와 보리(찬 성질)는 성질이 반대라 하루씩 마셔주면 보완이 된다고 챗gpt가 말하더라.


어제 설거지해서 쌓아둔 그릇을 정리하고, 내가 좋아하는 컵에 따뜻한 보리차 담아 마시며 식탁에 앉으면 대관령 산자락과 집 앞 너른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병원에 다녀온 후 매일 몸 상태를 기록하기 위해 아침마다 몸무게, 전 날 있었던 증상과 느낌들을 수첩에 적었는데. 다행히 회복 중이라 점점 쓸 말이 적어진다. 기록하지 않고 이틀, 삼일 넘어가는 날도 있다니 몸도 마음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나 보다. :-)


지난주. 그러고 보니 딱 일주일 전에 다녀온 병원에서는 '전이'는 아니며, 물도 더 늘은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주치의 개인사정으로 다른 의사 선생님이 대진을 하셔서 자세히는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한 달 뒤 원래 진료 보던 선생님을 봬야 하니까 ct 찍고 다시 내원하기로. 이번에 검사한 pet와 지난달 ct를 비교해 줬는데 남편이 보기에도 물이 줄은 것 같다고.


여행 갈 때 마다 갖고 다니는 '모찌'와 '무무' 인형


검사가 있기 전 여행을 다녀왔었다. 10월 말이 결혼기념일이라서 제주도를 예약해 두었었는데, '비행기 타는 게 무리가 아닐까?' 잠시 고민했지만 담대한 마음으로 다녀온 것이 잘한 일 같다. 그림처럼 우뚝 서있던 산방산에 오르면서

"여보, 들어봐. 뱃속에서 엄청 물 소리나."

하면서 공복에 복식호흡을 하면 배에서 나던 물 내려가는 소리(?)를 남편에게 들려주며

물이 내려가는 것인가, 흡수되는 것인가,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는 걸까를 궁금해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행 중이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여행 중에도 식단도 최대한 철저하게 먹으려고 (너무 맛있는) 제주도 흑돼지 따위 안 먹고!

갈치구이, 해산물, 메밀 조배기, 한식 반상 위주로만 식사했다. 물론 <카페 데스틸> 오란 프레소 한 잔에 퐁당 오 쇼콜라를 먹은 건 후회하지 않는다!!! 너무 마싯어...


한 달 전업 치병을 해보고 느낀 건데, 평소에 식단, 운동, 명상, 기도 등을 철저히 하고 불가피한 상황에서 운동을 못 한다거나,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을 때도 불안하거나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은 하긴 했지만, 이렇게 제대로 철저하게 하지 않았고 어쩌다 가끔 과자나 피자, 단 음료, 커피 마시면서도 엄청 죄책감 느꼈는데. 요즘은 잘 관리하고 있기에 그런 마음의 불안함이 확실히 덜하다.


밥 먹으면 꼭 30분~1시간 걸어주려고 했고, 사계해안 따뜻한 검은 모래에서 남편과 맨발 걷기 한 것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제주는 언제 와도 참 좋은 것. 바람이 많이 불긴 했지만 날씨가 참 좋아 한라산도 보고, 중산간을 넘나들며 만난 갈대와 억새에 감탄하고, 돌고래를 따라가며 소원도 빌어보고, 다음의 제주를 꿈 꾸기도 했다.




사실 제주도 여행 가기 전까지 강릉은 25일 중에 이틀 빼고 계속 비가 왔다. 분명 두 달 전엔 가뭄이었는데 장마가 따로 없었다. 그런 곳에 있다가 춘천을 들러 서울을 가니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거리마다 가로수가 운치 있는 모습으로 변하였고, 멀리 보면 산이며 높아진 파란 하늘도, 누구네 집 마당에 열린 감이며 모과도 주렁주렁 이었다.


제주 여행을 마치고, 병원 재검을 받고 집에 돌아오니 11월의 첫날. 2025년의 9월과 10월이 어떻게 지나갔는 지도 모르겠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경량 패딩에 우비 입고 바다로 나가고, 매일 야채 손질해서 찌고, 녹즙 내리고, 끼니때마다 신선한 음식을 하는 날들이었다.


하루에 두세 번 새로운 밥상을 차리고, 치우고, 운동하고, 아침저녁으로 반신욕 하고, 중간에는 또 체력 안배 때문에 쉬어줘야 하고... 쉬는 동안에는 좋아하는 OTT를 보며 온열기 타임을 갖는다. 잠이 솔솔 온다.


그래도 행복했다. 매일 하던 일이, 나의 소중한 일상이 그저 이렇게만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남편과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남편은 어디서 들었는지

"하느님께서 직접 챙겨주십니다."

자꾸 '직접 챙기시라'며 읊조린다. 그 모습이 참 웃기면서도 우리 부부의 간절함이 닿아있는 것 같아 애닮다.


비로소 강릉에서 '진짜 가을'을 맞은 회포를 풀기 위해 속초 영랑호에서 라이딩도 하고, 자생식물원과 청초호, 어제는 남편을 회사에 내려다 주고 아침 댓바람부터 장덕리 은행나무도 만나고 왔다. 미세먼지 없이 산이 골짜기 골짜기 다 보이는 날엔 경포호에서도 자전거를 탔다. '경포생태저류지' 메타세쿼이아 길이 예쁜데, 우연히 자전거를 타다가 경포천 너머 그곳까지 다녀왔다. 바람이 좀 차가웠지만 햇살이 워낙 따뜻했던 날이라 아름다운 강릉의 가을을 마음껏 눈에 담았다.


다음 주에 엄마가 오면 화부산 산책로와 신복사지도 가봐야겠다. 이제 정말 강릉을 떠날 날이 두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아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경포 생태저류지와 장덕리 은행나무
설악동성당과 자생식물원에서 만난 고양이 ♥


오늘은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실리콘 보호대를 하고 어씽을 해보려고 한다. 모래사장에서 하는 슈퍼 어씽은 다 좋은데, 나의 경우 풋크림을 잘 발라줘도 자꾸 오른쪽 엄지발가락 표피가 벗겨진다. 일단 방수 밴드 + 실리콘 보호대 조합으로 한번 더 해보고 안되면, 다른 운동으로 변경해야 할 것 같다.


등산화도 개시해야 하니 비선대나 소금강 계곡, 주전골 (오색약수)은 여기 있을 때 한 번씩 다녀오고 싶다. 지금 있는 곳도 충분히 공기가 좋지만, 산 속이나 숲으로 들어가면 정말 공기가 달다.


세종으로 가면 또 이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겠지. 요즘 매일 생각한다. 그러면서 항상 결론은 세종은 세종만의 장점이 있고, 강릉은 강릉만의 장점이 있으니 아쉬워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서 나에게 맞는 최선을 찾자는 것. 나와 남편은 여행을 좋아하고, 아이가 없으니 비교적 몸도 자유롭다. 결혼하면서 세종 파견, 강릉 파견, 해외 연수는 이미 계획했던 일이었다.


두 식구 짐이 단출해 포장 이사가 힘들지도 않고, 우리를 기다릴 신나는 일들이 기대되어 강릉을 떠나는 건 아쉽지만 빨리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사실이다.




이제 시간이 8시가 다 되어간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산등성이가 아주 잘 보인다. 오늘의 태양이 또 떠올랐다. 아침을 맞는 당연한 행복에 감사기도를 올리며 이제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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