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goodbye
올해를 씹어먹은 화사의 '굿 굿바이'보다, 구피의 '다 잘될 거야'를 메인 제목으로 낙점한 나란 사람. 옛날 사람... :^)
강릉을 떠나는 날이 밝았다. 작년 이맘때 세종에서 이곳으로 이사하던 날은 영하 15도를 웃도는 강추위였다. 장거리 이사라 새벽 6시부터 짐을 옮겼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쿠팡 배달원분이 하필 올해 제일 추운 날 이사하시냐며 걱정해 주셨다. 추위는 괜찮았는데... 그다음이 문제였지만. 쿨럭.
오늘은 기온이 영상 13도까지 오른다. 이 정도면 맨발로 바다를 걸어도 괜찮을 날씨다. 시작이 좋다. 작년과는 다르지. 아무렴.
12월부터였나 입버릇처럼 흥얼거리던 노래가 있다. 구피의 '다 잘될 거야.' 노래가 발매됐을 당시에도 크게 감흥이 없었는데 (아마 초등학생이었을 듯), 11월 중순부터 한 달간 원고를 편집, 출간 기획서 작성, 출판사 리스트를 업데이트했고, 12월 중순에 투고를 했다. 나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게 긴장되고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고심 끝에 투고를 결심했고, 건강을 위해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가도 식사를 잘 차려먹고 운동을 했다.
사천천을 가르는 둑방길을 걸을 때마다 이 노래를 중얼거렸다. 무의식의 반영일까. 꿈도 그렇다는데 하물며 깨어있을 때는 마음씀이 더 하겠지.
모두 잘될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복잡하게 꼬여있어도 그리 걱정하진 마
화를 낼 것까진 없어 누구 잘못도 아닌데
다만 때가 아니라고 편히 생각해 버려.
헤이 헤이 헤이 산다는 게 그런 거지
특별할게 뭐 있겠어 아등바등할 건 없어
헤이 헤이 헤이 큰소리로 웃어도 돼
내게 제일 행복한 건 바로 웃고 있는 그대니까
이 노래는 멜로디도 참 좋다. 가사는 물론이고. 어릴 때는 가사까지 음미하며 듣진 않았지만 부르며 곱씹다 보니 "산다는 게 그런 거지. 특별할게 뭐 있겠어. 아등바등할 건 없어.", "큰 소리로 웃어도 돼. 내게 제일 행복한 건 바로 웃고 있는 그대니까."라는 가사가 좋다.
안 그래도 최근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으려고 다짐했는데, 노래 가사에도 비슷한 가사가 등장하는 걸 보면 다들 비슷한가 보다.
'다 잘될 거야'를 매일 부르며 부지런히 강릉을 걸었다. 어느 날은 바다로, 어느 날은 소나무 숲으로 또 어떤 날은 대관령 산자락이 보이는 한적한 둑방길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어제는 남편과 강릉에서 제일 좋아하는 카페 '툇마루'에 가서 흑임자 커피를 마셨다. 커피의 도시 강릉에 와서 커피를 먹은 건 다섯 번 정도 되려나... 오후에 마시면 잠 못 잘까 봐 11시에 아침 먹고 설거지도 미뤄둔 채 달려갔다. 그리고 강릉에서 제일 좋아하는 산책 코스인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에 주차하고 솔숲을 걸었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그 길을 따라 경포호로 나갔지만 바람이 거세서 작은 정원만 둘러보고 돌아왔다. 봄에 벚꽃 피었을 때에도, 여름에 가시연꽃 보러도 자주 왔던 곳이었다. 관광객이며 현지인도 많이 찾는 강릉의 명소라 언제든 사람 구경하기 좋은 장소였다.
그 사이 남편 회사에서 표창장이 도착했으니 수령하라고 연락이 왔다. 사무실에 들러 상장을 챙기고 명주도서관에서 빌린 도서도 모두 반납. 한 번이라도 더 바다를 눈에 담고 가야 했기에 계속 걸어보고 싶었던 '원포리 해변'으로 향했다. 여기는 정말 인적 드문 시골의 해변가 느낌이다. 여름에도 다른 해수욕장에 비해 한산하고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느낌이랄까. 드라이브하기도 좋은데 내려서 걸으니 인도도 있고, 바다로 이어지는 데크도 있어서 사진 찍기 좋았다. 역시 차로 지나갈 때랑 직접 내려서 걸어보는 거랑은 다른 것 같다.
4시쯤 집에 돌아오니 많이 걸어서 그런가 둘 다 노곤노곤해서 쉬다가 저녁 먹고 본격적으로 짐을 쌌다. 내가 뽁뽁이로 포장을 하면 남편이 중요한 것들 차로 옮기고, 이사를 많이 해봐서 손발이 척척 맞는다.
왜 때문인지 결혼은 3년 차인데 이사는 4번 한 느낌. 유학 다녀와서는 이제 한 곳에 오래 정착해도 좋겠다 싶었다.
강릉에서 살면서 하고 싶었던 일들 중 적어놓고 못 간 곳은 양양의 낙산사, 고성 화암사와 화진포, 천진해변에서 예삐를 못 본 것, 정동진 이스트씨네, 울진 죽변항 스카이워크 등이다. 강릉의 유명한 카페들 쎄라비, 봉봉 방앗간, 홍제맨션 등도 건강을 챙기느라 기꺼이 포기했다. 바게트 샌드위치가 맛있는 강릉 여니 브레드는 재 오픈 이후 한 번도 못 갔고, 양양 첫밀 베이커리와 속초 허니네 빵 집을 못 가본 게 아쉽지만 언젠가 더 건강해져서 도전해보리라. 이밖에도 소금강 계곡과 설악산 등산을 더 많이 가지 못한 것, 스노클링 장비 갖춰서 들어가려고 물놀이를 미룬 것도 아쉬운 일들 중 하나다. 보리울림 명상 수업 중 '아침 바다 싱잉볼'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도 그렇다.
아쉬움이 남는다는 건 그만큼 강릉을 다시 찾을 이유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도 강릉에서 이룬 것들을 꼽아보자면 고난을 동력삼아 상반기 <읍사람의 이야기>와 <꺼내먹어요 1>를 매일 연재한 것, 이십 년 서사를 글로 쓰고 편집해 출판사에 투고한 것, 명상을 배우며 마음공부를 시작한 것, 나만의 치병 루틴을 세우고 매일 바다 어씽과 식단으로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 얼떨결에 7킬로 감량에 성공한 것, 남편의 업무 성과 덕분에 유학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 가족들이 놀러 와서 행복해했던 것, 사람보다 자연에게 기대는 법을 깨달은 것 등 아쉬운 점보다 훨씬 더 많다.
오랜 기간 잦은 투병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을 때에는 드라마도, 자극적인 신문 기사도, 소설도 힘들었다. 핸드폰 벨소리나 진동이 울려도 깜짝깜짝 놀래서 몇 년 동안은 무음으로만 해두었다. 누가 보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겨울이 아무리 혹독해도 봄이 반드시 오는 것처럼 마지막 치료 후 결혼을 하고 조금씩 안정을 되찾은 나는 드라마도 다시 보고, 안 읽던 어려운(?) 책들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편안하게 부담 없이 읽히는 에세이, 산문, 시집, 묵상집, 종교 서적들을 주로 읽었는데, 요즘은 관심사가 다양해져서 경제, 경영, 심리, 인간관계 등 사회과학 분야의 도서들도 많이 본다. 여러 가지로 회복되면서 나를 찾기 위해,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조금씩 천천히 노력 중이다.
아파서 힘들었던 시간들이 누적되면서 무기력해졌을 때에도 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내 인생 마흔부터"를 외쳤다. 그리고 올해 나는 정말 마흔이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늘 남에게는 관대하고 스스로에게는 야박했던 나지만, 이제 그런 어쭙잖은 완벽주의 따위 바다에나 던져버리고 희망찬 마음으로 새 출발을 응원하고 싶다.
강릉에서의 소소한 일상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함을 전한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다음 브런치북은 투고 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