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원도 보이스피싱이 되나요?

어쩌다 금융사기 전문가

by 윤이나

한 번뿐인 인생, 태어난 김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주의도 아니었던 나는 금융 사기에 연루됐던 경험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2011년.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청년인턴을 하던 때였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전화를 건 사람은 내 통장이 범죄에 연루되었다며 정신없이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제가요? 제 통장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전 그런 적 없어요."

계속 반박해 봤지만 결국에는 검찰청 사이트에 접속해 내 정보를 넣고 입증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던 나는, 심지어 듣도 보도 못했던 나는, 한참의 실랑이 끝에 고압적이 남자의 태도에 밀려 그가 말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고 눈앞에 대문짝만 하게 뜬 '대검찰청'이라는 글씨에 모든 의심을 거둔 채 홀린 듯이 계좌 정보를 입력했다. 모래시계가 돌아가면서 곧 화면이 전환될 거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

갑자기 섬광이 비춘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종료되면 수사에 불이익이 갈 거라며 으름장을 놓던 사내였다. 사무실에 있던 유선 전화를 사용해 '대검찰청'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을 때 비로소 모든 상황을 인지하게 되었다. 걸려온 번호를 차단한 후 곧장 은행으로 달려갔다. 내 정보들이 모래시계처럼 돌고 돌아 막 나쁜 놈들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행원은 계좌를 차단하기 위해 빠르게 손을 놀렸다. '타닥. 타닥. 타다닥'. 내 소중한 통장을 수호하기 위한 그 타자 소리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녀는 한참 화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고객님, 다행히 계좌에서 금액이 인출된 기록은 없는데 통장 잔액이 지금... 이십 원... 맞으세요?"

"네? 아... 그런가... 잠시만요."

생각지도 않은 전개에 나는 당황했고 직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렇게 이십 원뿐이었던 작고 소중한 계좌를 잘 봉쇄하고 은행을 나왔다. 없었던 허기가 그제야 밀려들기 시작했다. 혼자 쓸쓸히 순대국밥을 먹으며 '이런 거에 당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에 한 번, 근데 잔액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거에 한 번 웃펐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는 가족들에게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피싱범이 한 시간 통화해서 이십 원 빼간 거면은 야... 걔도 불쌍하다."

조롱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통장이 털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은 있었다. 아빠는 통장 잔액이 이십 원뿐이었던 딸이 불쌍했는지 거금의 용돈을 쏴주셨다.

현자는 말했다.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라고. 인턴 월급의 반은 저축했고 월급 다음날에는 카드값이 빠져나가는 구조라 내 통장은 딱 이틀 동안만 두둑했다.


첫 보이스 피싱은 운 좋게 피해 갔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두 번째 경험도 있었다.




인턴생활을 마치고 취업에 성공했다. 회사 컴퓨터 '즐겨찾기'에 은행 사이트를 등록해 두고 이용했는데, 물건 구입을 위한 계좌 이체를 진행하다 중단한 적이 있었다.

'얼마 전에도 샀는데, 이 신발을 또 사는 게 맞는가?'

심오한 질문 앞에서 양심의 소리에 넘어간 나는 과감히 구매를 포기했다. 그리고 며칠 후 같은 경로로 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했을 때 '보안 업그레이드'에 관한 절차를 수행해야만 했다.


처음 보는 화면이라 은행고객센터에 문의하니 얼마 전에 계좌이체 하다가 중단한 이력이 있어서 그런 거라며 업그레이드 완료하면 된다고 안내받았다. 계좌번호, 비밀번호, OTP카드의 숫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입력하라고 하는 게 이상했지만

'엄청나게 강력한 업그레이드인가 보다.'

하며 입력을 마쳤다.


그날 밤. 엉망진창이었던 소개팅에서 진이 쭉 빠진 채로 지하철에 올랐을 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내 명의의 공인 인증서가 재발급되었으니 본인이 아니면 신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건 또 뭐지?'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계좌를 추적하자 내가 인출한 적 없는 거금의 돈이 빠져나간 뒤였다. 일이 꼬이려니 마침 이 날은 월급날이라 월급과 각종 수당까지 입금된 시점이었다.

망연자실했다. 내가 당한 사기가 '파밍'이라는 것은 나중에 신문 기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OTP카드 번호를 전부 입력한 게 화근이었다. 분명히 업그레이드하라고 했는데, 나중에 고객센터에 연락해 억울함을 호소해 봤지만 그쪽이 말하는 업그레이드 개념에는 OTP를 다 입력하는 건 없었다. 보안카드 번호를 입력했던 건 내 책임이 맞았지만, 즐겨찾기로 들어가던 은행 사이트가 피싱 범죄의 무대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부모님이 해외여행으로 집을 비우셨을 때라 나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으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은행, 경찰서에 가서 신고했지만 범인을 잡을 수도 없고, 잡는다고 해도 돈을 돌려받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렵게 꺼낸 나의 고백에 유럽 어딘가에서 전화를 받았을 아빠는 딱 잘라 말했다.

"그거 못 찾아. 그냥 잊어버려!"

그 말에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한 달 치 월급은 날렸지만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내 돈을 찾을 수 있을까 잠 못 이룬 마음들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창피한 마음에 이 이야기는 정말 친한 사람들에게만 했다. 이제 브런치 독자님들도 내 찐친이다.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은

"원래 그렇게 다 홀린 듯이 당한다더라."

하며 주변에 더 큰 액수, 더 교묘한 수법에 당한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위로가 되다가도 한 푼도 못 쓴 월급을 생각하면 이불킥이 나왔다.


후 잊을만할 때 한 번씩 지인들에게 금융 사기와 관련된 연락을 받았다.

"언니 저도 당했어요. 700만 원이요..."

카드 대출과 적금까지 털린 후배는 넋이 나가있었다. 진짜 결단코 우리가 바보여서 당한 건 아니다. 나는 따뜻한 위로와 함께 "못 찾으니까 빨리 잊어버리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요즘은 보이스 피싱, 파밍을 너머 딥페이크 기술, AI를 활용한 각종 디지털 범죄들이 판을 친다고 한다. 기법도 더 정교해져서 눈뜨고 코베이는 일이 많다고 하니 특별히 유념해야겠다.


상경대를 나와 회계팀에서 근무했지만 얄팍한 경제 지식은 금융 사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급여 이체 담당이라 그날 아침 신나게 월급을 처리하고 행복해하던 나였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께 경제 교육도 받았지만, 진화하는 피싱 범죄에 무지했던 딸내미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제라도 죄송하다는 말씀 올리며 지금은 전화, 문자, 인터넷 광고에도 절대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내가 잃은 건 한 달치 노동의 대가였지만 이 일을 통해 얻게 된 것도 있다. '두 번 다시 금융 사기에 휘말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 같은 일을 당한 지인들과의 유대감?'이라고 쓰려는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런 교훈 다 필요 없으니 그때 털린 내 월급 돌려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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