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와 귀뚜라무 사이

온 우주가 너를 응원해

by 윤이나

남편에게 내년 1년 간 다른 나라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사내 장기 연수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현재 대학원 수업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1년, 외국에서 1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선발 과정 중에서 영어 성적이 필수였다. 작년에는 토익, 올해는 해외 학교 지원을 위한 토플이나 아이엘츠, 듀오링고 등의 점수가 필요했다.



선발 공고에는 적정 수준의 토익 기준 점수가 적혀있었다. 누가 봐도 무난한 점수였다. 남편은 유독 영어에 자신이 없어했지만 그래도 믿을 거라곤 똑똑한 무무의 머리뿐이었다.

프로그램 지원을 위해 남편은 영어 공부에 열을 올렸다. 무무의 귀에는 항상 듣기 실력 향상을 위한 '구형 이어폰이'이 장착되어 있었다. 블루투스 형태나 아이팟을 권했지만 어릴 적 앓았던 중이염 때문에 귀에 넣는 이어폰이 불편하다고 했다. 의 이어폰에서는 언제나

"왓 이즈, 왓 이즈, 왓 이즈... 와이 돈 츄, 와이 돈 츄, 와이 돈 츄~"

가 반복되고 있었다. 남편이 보여준 책에는 '점진적 구간 반복법에 따른 귀 뚫는 요령 수록'이라는 말이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었다. 본인은 가끔 사람들 많은 데서 하는 한국말도 안 들릴 때가 있는데, 영어 듣기가 취약하니 먼저 귀를 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로 남편은 차에서도, 화장실에서도, 회사 가는 차 안에서도 의문사만 나오는 구간 반복을 미친 듯이 돌려 들었다.

'저게 효과가 있나... 저래서 될까...'

싶었지만 공부법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거였다.


첫 시험 점수가 나오던 날, 생각보다 겸손한 숫자에 나와 남편은 시무룩해졌다. 노력을 안 한 건 분명 아니었다. 몇 주 뒤 두 번째 시험을 봤지만 성적에 큰 변화가 없었다.

우리 부부의 결혼 계획에는 애초부터 '장기 연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육아에 전념할 것을, 그렇지 않으면 저연차 때 외국에 나가 공부하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작년 가을, 뜻하지 않게 늑막과 심장에 물이 고이면서 임신 준비로 끊었던 타목시펜 (유방암 치료제)을 다시 복용하게 되었고, 아이에 대한 생각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장기 연수 공고를 기다리며 가열차게 '플랜 B를' 꾸었다.

그런데 설마 토플도 아닌 토익 점수가 발목을 잡을 줄이야!


시험이 보통 교실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보기 때문에 이어폰보다 오히려 스피커로 들어보는 게 어떤지 제안해 봤지만 남편은 소신 있는 사람이었다. 시험 날 스피커 가까운 자리에 앉아도, 멀리 앉아도 어차피 잘 안 들리는 건 똑같다고 했다. 중이염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사실 남편은 카페에서 계산할 때 점원의 말소리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웅얼거리며 말하거나 주변 소음이 심하면 더 그랬다. 성격 급하고 귀 밝은 내가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었지만 영어 시험은 달랐다. 진짜 귀를 뚫는 일이 시급했다.


"여보. 진짜 안 되겠다. 이제부터 여보는 '귀뚜라무'야. 우리 한번 귀를 뚫어보자!"

듣기 점수가 독해 점수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성적표를 보고 우리는 '귀뚜라무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망의 세 번째 시험. 점수가 전반적으로 오르긴 했지만 커트라인을 넘지는 못했다. 이제 감일까지 딱 한 번의 시험만이 더 남아있었다. 초조함이 밀려왔다. 만점도 아닌 점수 때문에 좋은 기회가 날아가버리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았다. 장기 연수는 남편의 오랜 꿈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본인은 더 부담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무무는 한 마리의 '귀뚜라무'가 되어 영어 지문을 듣고 또 들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날마다 책상 앞에서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오는 남편을 위해 무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불고기 전골'을 만들어 두었다. 애매한 표정으로 남편은 집에 돌아왔다.

"잘 봤어? 어땠어?"

라고 묻기도 뭐 했다.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시험에 대한 후기를 물었을 때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파트 2에서 여자 성우가 계속 화난 어조로 말을 하는 거야."

토익 파트 2는 주고받는 짧은 형태의 대화로 말투 또는 함축된 의미를 추론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근데 그 여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화난 채로 말하더라고."

"7번부터 31번까지? 쭉?"

남편은 틀림없이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헷갈렸다고 하면서, 그 여자 성우가 뭐 안 좋은 일이 있는 채로 녹음을 했는지를 걱정했다. 황당했지만 이미 시험은 다 끝나버린 후였다.


식사 후 모처럼 간 카페에서 남편은 가채점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대평가라 점수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충 몇 점 정도 나올지는 예상해 볼 수 있었다. 한동안 대화에 집중 못하던 남편이 핸드폰과 계산기를 번갈아가며 두들기다 화색을 띠며 말했다.

"여보! 커트라인 넘을 것 같아요. 엄청 잘 봤는데? 지금 이거 이거 틀린 걸로 계산하고 다른 거 다 맞는데, 점수가 완전 높아!"

마지막 기회였던 시험에서 남편은 기적적으로 이백 점 가까이 점수를 올렸다. 고작 이주만의 일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커트라인 보다 훨씬 높은 점수로 지원할 수 있었다. 귀뚜라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토플이 남았다. 토익은 나도 공부했던 시험이지만, 토플은 교환학생 때문에 학원 등록했다가 3일 만에 환불받았기 때문에 조언도 해줄 수 없었다. 두 손, 두 발 다 든 나로서는 그저 어마무시하게 어려울 것이라는 것 밖에 모른다.




이제 무무는 더 이상 '귀뚜라무'가 아니다. 올해는 그 보다 한 단계 격상된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 바로 '토미'. '토플에 미친 자. 토플에 한 번 미쳐보자'는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

남편은 오늘도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여전히 그의 귀에는 C타입 유선 이어폰이 꽂혀있고, 같은 문장이 무한 반복되고 있다. 무무는 무턱대고 시험과 관련된 책을 펴기보다 일단 뚫다 만 귀를 계속 뚫고, 영문법을 쳬계적으로 공부하며 독해와 쓰기 시험을 대비한다는 전략을 세운 것 같았다. 1월에 산 모의고사 문제집을 아직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걸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람은 이 집안에 나뿐이다.

방 문을 열 때면 자주 게임과 재테크에 열중하고 있는 남편과 마주하지만 인내하는 마음, 무무를 믿는 마음으로 일관할 것이다. 물론 그러다 한 번씩 외치겠지.


"헤이, 토미~ 와이 돈 츄 스터디 잉글리시 모어?"

아이 트러스트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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