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가 있어서 다행이야

HOT <캔디>

by 윤이나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문화 대통령'으로 등극했다면 HOT의 등장은 '십대들의 승리'라는 의미였다. 1집 후속곡이었던 '캔디'가 널리 알려지면서 HOT 신드롬은 장대한 서막을 열었다. 아이돌 문화가 없던 당시 HOT의 등장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 말하면 학교의 모든 여자아이들은 전부 HOT 팬이었다. '강타 부인, 희준이 마누라'가 한 반에 몇 명씩이던 기현상도 일어났다. 캔디 무대의상인 털모자, 먼지 인형, 멜빵바지, 벙어리장갑 등은 유행처럼 번졌다. 유행에 둔감한 나도 먼지 인형 두 개를 사서 가방에 달고 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HOT의 히트곡이 연달아 유행하면서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때까지 수련회의 밤은 HOT를 따라 하는 무대로 뜨거웠다. 셔츠 자락을 펄럭이며 강렬하게 춤추는 친구들의 모습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 충분했다.

오빠들이 나오는 무대를 보려고 가요톱텐 본방 사수는 물론, 집을 비우는 날에는 비디오테이프로 예약 녹화를 해서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친구들과 '드림 콘서트'에 가기도 했으며 저 멀리 무대에서 점처럼 보였던 강타 오빠와 눈 마주쳤다고 호들갑을 떨던 소녀가 나였다. 매일 밤 HOT와 우연히 만나는 에피소드를 상상하며 꿈나라로 향했다. 내게는 그들이 첫 아이돌이었다.




호되게 아프면서 인생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가장 후회되는 일들은 의외로 사소했다. 수학여행 가서 장기 자랑 한 번 못한 것,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지 못한 것이 그렇게나 아쉬웠다. 학창 시절의 나는 쾌활했지만 비교적 얌전한 아이였다. 공부도 노는 것도 모두 잘하는 학생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다재다능한 편은 못됐다.


친구들 앞에 나설 용기가 없어 수련회 때 장기자랑 한번 나가지 못했고, 짝사랑했던 친구에게는 내 마음을 철통같이 잘 숨겼다. 바람은 늘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다.

친구들과 집에 모여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 엉덩이 춤 연습도 열심히였고, SES가 나왔을 땐 꼭 누가 유진이고 바다, 슈인지 엄격하게 정해 파트를 나눴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멋진 의상을 입고 환호성을 받고 싶었지만 항상 마지막 한 뼘의 용기가 부족했다. 아쉬워지려던 찰나 바로 그 노래. HOT의 캔디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시청각실에서 열렸던 우리 반만의 장기자랑이 있었다.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HOT 캔디 노래에 맞춰 춤을 췄던 기억이 소환됐다. 반에서 키가 큰 여자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청바지에 청조끼, 와인색 실크 남방을 입고 앞에 앉은 친구들과 눈이 마주칠 새라 부끄러워 허공만 보며 열심히 춤을 췄다. 망치춤이 있던 장우혁의 랩 파트에는 우리끼리 나름대로 안무도 짜서 넣었다. 뚝딱이였지만 외운 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무사히 무대를 마칠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선생님께서 준비해 주신 스프링노트 한 권을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차오르던 환희는 어린 마음에도 뿌듯함이 뭔지, 도전과 성취가 뭔지 알려주기 충분했다.


이렇게 HOT의 캔디는 나의 첫 장기자랑 무대의 배경 음악이 되었다. 그렇게 자신 없어하던 춤도 췄는데 노래가 뭐 대수랴.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 곡을 선택했다.

예전에는 여행사 패키지여행에 가면 차 안에서 마이크를 돌리며 자기소개를 하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시키기도 했다. 중학생이 됐어도 아이는 아이인지라 나는 장기자랑을 피할 수 없었다. 가이드분이 갑자기 노래를 한 곡 하라고 요청했다. 당황스러웠지만 버스 안의 모든 눈이 나로 향하고 있어 피할 도리가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입을 뗀 곡도 바로 이 노래였다.


"사실은 오늘 너와의 만남을 정리하고 싶어. (중략) 단지 널 사랑해. 이렇게 말했지."

후렴부터 부를걸. 나는 언제나 그랬듯 첫 소절부터 정직하게 시작했다. 가이드 선생님이 아주 잘 불렀다고 칭찬해 주셨다. 같이 여행했던 분들도 박수로 격려해 주셨지만 다소 민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럴 때 크게 고민하지 않고 부를 노래가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음이 높지도 않고, 따라 부르기 좋고, 당시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아는 그런 곡이었기 때문이다.



2019년 가을 고척돔에서 열린 HOT 콘서트에 다녀왔다. 무한도전 '토토가' 방송을 제외하면 17년 만의 완전체 무대였다. 대학 동창들과 함께 사춘기 소녀로 돌아가 함성을 지르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친구들은 아이와 남편을 두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내와 엄마라는 현실과 회사 스트레스 모두 벗어던지고 아이처럼 뛰며 즐거워했다.

캔디의 전주가 나왔을 땐 가장 큰 환호소리가 들렸다. 다 같이 목을 놓아 열렬한 떼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곡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HOT의 노래와 춤, 패션 등 모든 것이 화두였다.

"다신 너 혼자가 아냐. 너의 곁엔 내가 있잖아."

라는 캔디의 마지막 가사처럼 가끔 꺼내보는 옛 추억에는 언제나 이 노래가 있을 것이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