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피할 수 없다라면

이현도 <사자후>

by 윤이나

애틋했던 스무 살 시절을 지나 대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나는 처음으로 '암'을 만났다. 가을 학기가 막 시작되고 동아리 회의가 있던 날이었다.

"오늘 몇 시에 들어오니? 집에 빨리 와. 병원 결과 나왔어."

귀가를 재촉하는 엄마의 문자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가슴에 만져진 동그란 물체를 수술한 뒤였다.

'의사 선생님이 분명 모양이 동그랗고 예뻐서 나쁜 건 아닐 거라고 했는데... 이렇게 어린 환자는 본 적 없다고 안심하랬는데...'

나는 인자하게 웃던 의사 선생님의 말을 상기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엄마 아빠가 역까지 나와계셨다. 축 내려앉은 분위기에 나는 선뜻 입을 떼지 못하는 부모님께물었다.

"암 이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작은 일에는 소심하지만 큰 일에 담대했던 나는 슬퍼할 새 없이 곧바로 인터넷 카페에 가입하고 가발을 검색했다. 항암 준비물도 미리미리 챙겼다. 티비나 드라마 속 암환자들은 두건을 쓴 검은 얼굴로 계속 구역질을 하다 끝내 죽고 말았지만, 어리고 무지했던 나는 정확히 암이 어떤 병인지, '완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았다.


조직검사 샘플이 바뀌었을 거라고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빠와 계속 울기만 하는 엄마를 데리고 대학 병원에 갔다. 의사는 전체 유방암 중 극소수인 엽상육종이라며 재발이 잦고 예후가 좋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수술 범위, 치료 방법을 들으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무너져 내리는 부모님과 달리 나는 담담했고 평소처럼 수업을 들으러 학교로 향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애들이 전부 휴지를 붙잡고 울었다. 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화장실에서, 수화기 너머로 지인들은 나보다 더 많이 슬퍼했다.

"엄마. A언니가 막 울어. 언니 어머니도 예전에 유방암 치료받으셨데..."

"걔는 얼마나 힘든지 옆에서 봤으니까. 다 아니까 우는 거지..."

밝고 똑 부러지는 A선배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휴학을 신청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나버려서 교수님들께 메일로 내 상황을 전했고 중간고사가 끝난 후 수술을, 학업과 병행이 가능한 방사선치료를 먼저 시작했다.

나는 항상 다인용 병실에서 가장 나이 어린 환자였다. 다들 자식이나 배우자가 간병인으로 와있는데, 늘 내 곁에서 쪽잠을 자는 건 우리 엄마였다. 허리 한 번 펼 새 없이 쪼그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도 애처로웠지만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병원과 (대)학생은 어울리지 않았다.


수술 후에는 출근 시간 꽉 막힌 도로를 뚫고 매일 8시까지 병원에 출근했다. 학교 수업 놓치지 말라며 맨 처음 순서로 치료해 준 방사선과 선생님들에게는 지금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 타라고 격려해 주셨는데, 병원은 나에게 늘 춥고 삭막한 곳이었지만 가끔 만나는 그런 분들 덕분에 온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공포의 빨간약'이라고 불리는 아드레이아마이신을 6번 맞는 치료였다. 이십 년 전에는 구토방지제도 임상 시험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난 후 어렵게 받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6번 치료 중 4번만 지급이 되었기에 남은 두 번은 꼼짝없이 변기와 함께 지냈다.

약 부작용 중에 탈모가 있어서 일찌감치 머리를 밀어버린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섰을 때,

"생각보다 괜찮은데? 엄마! 나 완전 타조야."

타조가 돼버린 모습에 우리는 빵 터져버렸다. 나는 양손을 뒤로 올리고 타조를 흉내 내며 장난스럽게 거실을 뛰어다녔다.


두려움을 몰랐던 나는 큰 어려움 없이 항암 치료를 마쳤다. 병이 일찍 찾아온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젊고 건강했기 때문에 금방 체력을 회복하고 잘 이겨낸 것도 있었다. 다만 저만치 앞서 나가는 것 같은 친구들의 삶을 볼 때면 '나는 왜 자꾸 아프지.' 속상하고 위축되기도 했다.



항암 치료가 끝나고 첫 외출을 했을 때 mp3에서 이 노래가 나왔다.


절망의 늪에서 빠져만 있기에
나의 젊은 시간이 너무 짧다.
다시 일어서는 내 의지와 함께
손잡을 사람들은 어디 누군가?
더 내려갈 수 없는 절망의 끝에 떨어졌다 해도
여전히 태양은 머리 위에 타오름을
이제 깨달을 그 시간이 왔다.

운명을 피할 수 없다라면
그대여 그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라!
소년의 여름에 찾아냈다.
여기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 다이아몬드.


듀스의 멤버였던 이현도의 솔로곡 <사자후>였다. '사자후'란 사자의 우렁찬 울부짖음이란 뜻으로, 크게 부르짖어 열변을 토하는 연설을 이르는 말이다. 생각 없이 걷다가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운명을 피할 수 없다라면, 그대여 그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라!"

이 가사가 마치 나에게 하는 이야기 같았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다짐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당당히 맞서겠다고. 도망가지 않고 겁내지 않고 씩씩하게 헤쳐나가겠다고.


몇 차례 더 암을 만나며 투병은 나의 인생에서 꽤 진한 자국이 되었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니체의 말처럼 나는 부단히 내 운명을 사랑하려고 애썼다. 설령 그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이었어도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다 지나간다'는 말을 붙잡고 인내하던 때에도,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악다구니를 써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던 시간이 흘러갈 때까지 견디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머리카락이 없어 한 여름에도 비니를 쓰고 누가 볼 새라 조심조심 외출을 하던 어린 날의 내가 떠오른다. 아이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걸음을 멈춰서 펑펑 울고 있었다. 신의 음성처럼 어느 가수의 노랫말이 아이의 마음을 닦고 어루만져주었다.


지금도 여전히 노래를 들을 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차오른다. 세상의 모든 영원 불변한 것들 중에 '노래'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