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약 같은 친구

안재욱 <친구>

by 윤이나

나에게는 보약 같은 친구가 있다. 홍삼 인삼 산삼처럼 값지고 귀한, 몸과 마음에 좋기로는 그 보다 더한 지기(知己)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영은은 대학 합격 후 만난 나의 첫 친구다. 인삼으로 유명한 충청남도 '금산'에서 올라온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건강미가 넘치는 아이였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는 삼 농사를 하시는 부모님을 도와 그런 거라며 해맑게 웃던 영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영은은 배려심이 많고 주변을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자취방에 놀러 가기로 한 날. 가느다란 침대 하나에 책상 하나, 문 열면 보이는 작은 창문이 전부였던 곳에서 나에게 침대를 내어주고 친구는 바닥에서 쪽잠을 잤다. 그녀가 그렇게 불편하게 자야 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끝끝내 거절했을 텐데, 선뜻 침대를 내준 영은의 호의를 나는 덥석 받아들였다.

이 방에서 제일가는 호사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잠자리가 바뀐 나는 밤새 뒤척이며 아침을 맞았다. 친구가 깰까 봐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지만 바닥에 누운 영은도 잠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아무렇지 않게 잘 잤다면서 일어났다. 퉁퉁 부은 얼굴로 등교하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학교를 휴학하고 항암 치료를 했을 때였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나를 위해 영은이 집에 온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니는 금산 절에 스님한테 너에 대해 말씀드리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어. 스님이 기도해 주신데."

친구는 담백하게 말했다. 빡빡이가 된 모습에도 영은은 놀란 기색 없이 나를 전과 똑같이 대했다. 환자처럼 안쓰러워하지도, 이겨내야 한다면서 마구 힘을 불어넣지도 않았다. 필요할 때 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가 영은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하루 종일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함께 잠을 청했다. 싱글 침대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자리를 조금 더 양보하며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영은은 옆에 누워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쌍꺼풀 없는 친구의 큰 눈이 꿈뻑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눈빛에서 무수한 연민과 애틋함이 묻어났다. 동정이나 애처로움이 아니었다.

"영은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

정적을 깨는 나의 말에 친구는

"아침에 일찍 어머니 농사일 돕던 게 습관이 돼서..."

그뿐이었다. 그녀는 언제부터 잠든 나의 모습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마치 부모가 아픈 자식을 바라보는 것 같이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친구는 그날 아침 내 앞에 있었다.


사실 아직 어렸던 친구들은 나의 소식을 듣고, 어떻게 나를 대해야 할지 몰라 거리를 두기도 했고 연락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등 돌리지 않고 함께 울어주고 손 잡아준 친구들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뿐이다.



우리는 지금도 함께이고 여전히 서로의 인생에서 희로애락을 나누고 있다. 졸업과 취업, 연애와 이별, 동호회 활동, 여행, 등단, 투병, 이사, 부모님의 환갑, 동생의 결혼 등 청춘의 모든 날은 물론 가족 대소사도 잊지 않는다. 나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읽으며 영은은

"사랑하는 이나에게."

문장을 두고 한참 목이 메어했다. 결혼식 전에 연습을 하면서도 내내 눈물바람이었다고 말한 터였다. 이렇게 고맙고 한없이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괜스레 힘든 날 턱없이 전화해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던 너
늘 곁에 있으니 모르고 지냈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들

(중략)

세상에 꺾일 때면 술 한잔 기울이며
이제 곧 우리의 날들이 온다고
너와 마주 앉아서 두 손을 맞잡으면
두려운 세상도 내 발아래 있잖니


안재욱의 <친구>라는 노래를 들을 때면 젊은 날의 우리 모습이 떠오른다. 내 인생의 많은 날 곁을 지켜준 친구처럼 나도 그녀가 힘들고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아내로, 엄마로, 살림과 직장 생활도 척척 잘 해내고 있는 영은에게 '보약 같은 친구'가 돼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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