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팔 할(八割)

자전거 탄 풍경 <너에게 난 나에게 넌>

by 윤이나

평생 동안 노래 한 곡만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를 고를 것이다. 노래는 기타 소리와 함께 정감 있게 시작한다. 하나 둘 다른 악기가 리듬을 더하면서 보컬의 미성으로 곡은 시작된다.


너에게 난 해 질 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음-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내 외롭던 지난 시간을
환하게 비춰주던 햇살이 되고
조그맣던 너의 하얀 손 위에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의 약속이 되어

나는 이 노래를 미시령, 한계령처럼 산이 깊은 골짜기를 넘을 때 즐겨 듣곤 했었다. 제주도 중산간을 넘어갈 때도 더없이 좋은 노래였다. 청량한 가사와 싱그러운 멜로디가 바람, 산 내음, 물소리, 새소리와 어우러져 오케스트라의 음악처럼 완성되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빗속을 뛰어갈 때 나오던 노래라 그런지 빗방울이 떨어져도, 달리면서 들어도 꽤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무엇보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인생 가장 푸르던 날의 추억들이 짙은 초록빛으로 무성하게 살아난다.




꿈에 그리던 대학 생활 중 나를 키운 팔 할은 동아리 활동이었다. ISO라는 명칭의 국제학생회는 외국인 교환학생들을 돕는 대외협력처 산하의 학생 자치기구였다. 주로 교환학생들의 학교생활에 도움을 주고, 본교 학생들과 교류를 위한 활동을 다. 아무래도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을 만나다 보니 외국어 실력은 필수였다. 영어는 잘 못하지만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다는 마음만은 으뜸이었던 나는 오래 망설인 끝에 ISO에 지원서를 냈다.


개강 첫 주 방과 후에 예정된 ISO 면접을 기다리며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고치고 또 고쳤다. 그러고도 용기가 나지 않아

'집에 갈까? 그냥 돌아갈까?'

가방을 몇 번씩 쌌다 풀었던 게 기억난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불어, 독어, 스페인어... 유창하게 전공 언어를 구사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나는 정성껏 우리말로 대답했다. 영어와 일본어를 할 수 있었지만 워낙 잘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굳이 나까지 입을 열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한껏 겸손해져서 돌아가는 길 버스 안에서 합격 연락을 받았다.

"저... 저는 외국어를 막 잘하지 않는데, 혹시 왜 뽑힌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진짜 궁금한 마음이 앞선 나는 합격 소식을 전하던 선배에게 조심히 물었다.

"아~ 자기소개서를 너무 열심히 써주셔서요."

쓰는 데 진심인 건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제출하기 전까지 수정을 거듭하던 나의 서류에서 선배들은 가능성을 본 모양이었다.

'간절하면 통한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체감했던 ISO 면접 이후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 집에 가지 않은 것은 신의 한 수였고 ISO는 나의 대학 생활 화룡점정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통번역대학원 건물 2층에 마련된 공간에서 시간별로 담당자를 정해 ISO 데스크를 운영했다. 교환학생들이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매 학기 재학생과 1대 1 언어 교환 프로그램, 각 나라의 영화를 상영하며 문화도 소개하고 음식을 맛보는 무비 나잇,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축제를 함께 기념하기도 했다. 음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많은 학생들과 사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국제학생회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실제로 활동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ISO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강압적으로 술을 권하지도 않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선배들과도 존댓말을 쓸 뿐 친구처럼 편한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엄격한 위계질서 보다 수평적이고 조화로운 문화가 ISO의 강점이었다.

내가 새내기였던 당시 일곱 살, 여덟 살 차이가 났던 편입생 선배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입생들을 막내 동생처럼 귀여워했고, '아빠'라고 부르라며 격 없이 대해주었다.

하루는 당시 유행하던 신조어에 몰두해 있던 나를 선배 한 명이 조용히 불렀다.

"개감동, 개좋아, 개짜증..."

단어 앞에 '개-'를 붙이면 의미가 증폭되는 느낌이라 나는 우스갯소리처럼 자주 사용하곤 했다.

"너 왜 자꾸 "개짜증, 개감동, 개- 개-" 이런 말 써?"

"재밌잖아요. 아하하하."

"너랑 안 어울려. 그런 말 쓰지 마."

아빠처럼 따르던 J오빠는 나를 조용히 불러 입에 붙은 "개-"자를 빼라고 조언했다. 웃기게 말하는 사람을 막연하게 동경하던 나였다. 성격 좋고 온화한 J선배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한 뒤 나는 그의 말에 수긍습관을 고칠 수 있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했지만 그도 겨우 스물일곱 어린 학생일 뿐이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와서 생활하면서 누군가 내 말투나 억양, 내가 쓰는 단어에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더 나쁜 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다들 그냥 넘기거나 뒤에서 수군댔을 뿐인데. 사회생활을 한 후에 그래도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해 주는 선배가 고마웠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생애 한 번뿐인 성년의 날 깜짝 이벤트를 열어준 것도 동아리 사람들이었다. 감흥이 없던 성년의 날 우연히 동아리방 문을 열었을 때, 전지 위에 붙은 네 송이의 장미를 발견했다. 올해 성년이 된 네 명의 ISO 멤버들을 위해 또 다른 선배가 준비한 것이었다. 붉은 장미 아래는 우리 이름이 쓰여있었고 '성년이 된 걸 축하해~!'라는 문구도 보였다. 예상치 못했던 그 꽃 한 송이가 나에게는 어떤 선물보다 값지고 귀한 추억이 되었다.


매주 월요일 동아리 방 청소를 하고 짜장면을 시켜 먹었던 것, 외국인 학생들과 교수님, 그 가족들까지 모두 모여 성대하게 즐겼던 할로윈 파티, 한복을 입고 인사한 코리안 무비 나잇, 브라질 음식과 영화를 처음 맛보던 순간들, 교환학생들과 에버랜드에 놀러 갔던 것, 재일교포 3세 친구와 진한 우정 등 국제학생회 일원으로 활동했던 건 대학 생활의 팔 할이 되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였다.


졸업 후에도 5월 1일마다 정기적으로 OB모임을 가졌지만, 만남을 주도하던 선배들이 하나 둘 결혼하고 아기 아빠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지금도 매년 노동절이 되면 ISO 졸업생 모임이 열리는 걸로 알고 있다. 이제 나이가 한참 많아져서 모임에 가기는 무엇하지만, 같이 활동했던 동기와 선배들이 보고 싶은 마음은 한가득이다.



오랜만에 대학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결혼식이었는데, 스몰웨딩 인원 제한으로 남편의 회사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교류 없이 십 년 만에 청첩장을 보내는 게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두터운 친분과 선배들의 결혼식에 필참 했던 나였기에 격조한 세월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결국 청첩장을 보내지는 못했다. 간간히 연락했던 선배 두 명만 초대했는데 막상 그들의 얼굴을 보니 다른 사람들 생각이 더 났다.


'경조사'에서 경사가 다 끝나버려 다들 언제 얼굴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람이 있다면 그때 그 시절처럼 딱 한 번만 동아리 모임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웃고 떠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도 항상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 애정이 묻어나던 ISO 사람들. 건강하게 잘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자탄풍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그 노래를 부르며 오늘도 아쉬운 마음을 달래 본다.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음-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글 쓰기 위해 찾은 ISO 롤링 페이퍼. 개명 전 이름으로 나와있다.
수, 일 연재
이전 06화보약 같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