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나를 맞이할 준비
20대에 남들이 감탄하는 가장 예쁜 옷을 입었다면
30대는 남들과 다른 개성 있는 옷을 입었고
40대는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입었다.
비로소 오십이 되자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 내가 가장 좋아하고 나에게 가장 편안한 옷을 입게 되었다.
오십은 남이 아닌 나로 나에게 다가서는 때다. 남의 삶을 숙제하듯 살던 일상에서 나의 삶을 축제하듯 사는 황금기다.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 중 <이서원>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칼로 무 자르듯 인생을 명확히 잘라서 구분을 할 수는 없어도 연극처럼 1막과 2막과 같은 구분선은 있다.
결혼하고 출산을 하며 2막에 들어갔고 나보다는 항상 아내로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우선이었다.
나의 어린 20대는 어설픔이었고 30대는 젊음이라곤 느낄 새도 전혀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보낸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이 정신없는 틈에서도 '집에서 아이만 키우다가 다 크고 나면 난 뭐가 남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당장 나가서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울 자신은 전혀 없었다. 난 경력단절녀였고 나를 불러줄 곳은 없었다. 아이를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보내면서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었다. 아이를 좋아하니 '보육교사를 해볼까'
고민하던 중 남편과 아이 어린이집 원장님이 적극적으로 해보라고 해주셔서 용기를 내어 제대로 배워보겠다고 인강 수업도 아닌 대학 부설 교육원 1년 과정을 수료하고서 3년의 어린이집 교사 생활을 했다.
싱글일 때 일을 하는 것과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한다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나는 3년 만에 항복선언을 하고 작은 아이 초등 입학과 함께 다시 경단녀가 되기로 나 스스로 결정을 했다.
모든 잎들이 꽃이 되는 계절인 가을은 두 번째 맞이하는 봄이다
행복한 죽음 <알베르 카뮈>
그때까지는 인생을 주어진 숙제를 하는 것처럼 살아왔었다. 나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마치 정해진 규율을 따르듯 수동적으로 살았다.
현재는 하고 있는 숙제를 열심히 해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이고 주어지던 숙제 같은 사십 대가 끝나면 어떻게 오십 대를 맞이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아이들과 남편은 다들 자기들만의 자리가 있을 텐데 도대체 나의 자리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
그 당시 부동산이 붐이었고 나도 이래저래 덕을 조금은 보기도 했고 관심도 많았다. 눈길 가는 게 주변 부동산이었기에 공인중개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등교를 하면 재빠르게 청소하고 커피를 내려서 노트북을 켜고 인강을 들었다.
오후는 큰 아이가 학원에 간 시간 작은 아이 공부를 봐주고 저녁 준비를 했다.
8시가 되면 나는 거실 책상에 오전에 들었던 수업 책을 펼치고서 복습을 했다. 그때 아이들도 앞에서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렇게 책상에서 굿 나이트 인사를 했다.
혼자만의 조용한 밤시간이 집중의 최고 시간이었고 그 시절 난 고3 때보다도 열심히 했었다.
(고등 시절에 그렇게 했음 더 좋았을 걸 후회를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내 인생에 진짜 열심히 공부해 본 적 있는 기억을 남기며)
나는 공부한 첫해에 1,2차 중 1차는 붙고 2차는 1점 차로 낙방했다. 한방에 패스할 수 있었는데 그 1점이 날 또 1년 더 책상에 앉게 만들었고 다음 해에는 2차 시험만 쳐서 합격을 하고 그 시절 중년들의 고시라고 했던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거의 10년 전)
그 자격증 시험을 통해서 얻은 게 단지 자격증만이 아니다.
우선 남편은 내가 그렇게 빨리 합격할 거라 믿지 않았다고 한다. 5년 정도 하겠지 예상했다고
주위에서도 다들 놀라더라며 내 합격 발표날 나에게 밥을 산 게 아니고 직장 동료들에게 한 턱을 쐈다고 했다.
그날 이후 남편은 날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나도 스스로 선택해서 해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처음에 아이들은 엄마가 왜 자격증을 따려고 하는지 의문을 가졌었다.(학생이 아니면 공부를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너희가 커서 더 이상 엄마의 도움이 없어도 될 때 나도 하는 일이 있어야 하잖아. 그래야 너희가 안 놀아준다고 징징거리지 않지. 아니면 너희한테 전화해서 언제 오냐고, 나 심심하니 놀아달라고 한다"
"내가 놀아주면 되지. (그래, 그때 너는 고작 8살 초등 1학년이었으니. 지금은 문자에 답도 이틀 후에야 '넵' 하나로 보내는 녀석이 되어버려 놓고선)"
인생을 100미터 달리기로 생각할 때가 있었다. 오십은 절반에 해당하는 터닝 포인트다. 절반을 돌아 남은 절반을 즐겁게 달리고 싶지만 떨어지는 체력과 침침해지는 눈이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이전 50년보다 더 즐겁게 남은 50년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오십 이전의 삶을 몸으로 살아왔다면 오십 이후의 삶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시기라 믿는다.
오십 이전이 남의 이유로 남의 삶을 사는 시간이라면 오십부터는 나의 이유로 나의 삶을 사는 시간이다.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 중 <이서원>
이제 50대를 들어서며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올해 애들이 다 기숙사로 갔고 가기 전부터 열심히 워밍업으로 알바 자리를 알아봤지만 날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현실도 뼈저리게 느꼈다. 다행히 애들이 떠난 다음날부터 짧은 시간이지만 알바를 시작했고 나는 현재 사회로 다시 나갈 워밍업 중이다.
그리고 어릴 적 누가 볼까 부끄러워서 꽁꽁 숨겨두었던 꿈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리고 감히 내가 엄두도 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은경 선생님의 슬기로운 초등생활'로 인해서 내면 깊숙이 있던 하고픔을 끄집어 올렸고 실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스스로 찾은 또 다른 나만의 숙제를 만든 것이다. 이제 이 숙제를 잘해나가면 될 것이다.
읽어야 할 책이 많다는 것과 하고 싶었던 글쓰기가 있다는 생각에 내 마음에 불안감도 사라지고 마치 빈 속에 따뜻한 음식으로 가득 채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어느 정도 구상해 둔 마음이랄까.
그래서 나는 지금 쫓기지도 않으며 천천히 내 페이스를 찾으며 스스로 만든 과제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여태껏 몸이 주인이고 마음이 시중을 드는 시간이었다면 오십 이후는 마음이 주인이 되고 몸이 시중을 드는 시간이다.
사람은 할 일이 없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아서 늙는다. 시야를 넓히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
퇴직은 있어도 은퇴는 없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는 해야만 하는 일에서 퇴직한 후 하고 싶은 일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할 때다.
이제는 더 이상 남의 일을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황금기에 당동한 것이다.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 중 <이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