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시대, 우리에게 '노인'은 어떤 의미인가? - 하

<나이듦에 대하여> 컨퍼런스를 보고 온 후기

by 유니버셜

*글에 나온 모든 내용은 컨퍼런스에서 듣고 온 내용을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여 개인 문체로 옮겨 담았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생각을 해보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생각했고, 준비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번 <나이듦에 대하여> 컨퍼런스를 보기 전까지,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죽음'에 대해 나름의 생각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때문에 현재 스위스에서만 시행되고 있는 '안락사'를 우리나라에도 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개인이 원하지 않는 연명치료는 거부할 수 있도록 법적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번 컨퍼런스를 보고 나서 깨달은 점은 -

앞서서 주장해 온 이야기들이 한 번도 '나'를 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주변에서, 혹은 미디어를 통해 보고 기억하는 적지 않은 죽음들을 안타까워하면서 (잘 살다가 갑자기 죽는 '자살'이 아닌 경우) 근 미래에는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라는 다른 이들이 겪을 미래를 향한 막연한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존재가 큰 사고가 있지 않는 이상 언젠가 '나에게도 또한' 닥칠 일이라는 것은 염두에 둔 적도 없는 것이다.


대체 우리가, 당신과 내가 겪을 죽음을 기다릴 그 시간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 시간에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과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컨퍼런스의 한 연사로 나왔던 <송병길 '의료'인류학자>의 강연의 내용은 나에게 다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송병길 학자의 이야기는 직접 관찰한 요양병원(복지시설)에서 남은 여생을 살아가고 있는 한 할머니의 식사와 호스피스(병원)에서 2주의 시한부 인생을 사는 한 할아버지의 식사를 비교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둘에게 차이점은 자신에게 남은 인생에 따른 '공간'이 차이이다.


학자가 할머니를 만난 건 어느 날 간식 시간인 4시쯤 이랬더랬다.

할머니는 4시에 맞춰서 간식을 먹는 장소에 나오셨고, 그날의 간식이었던 '팥죽'을 천천히 다 드신 후 앉아있으셨다.



학자는 물었다.

'할머니, 팥죽은 맛있으셨어요?'

'아니- 그냥 먹는 거지. 나는 팥죽을 아주 싫어해.'

'아니 그럼 안 드시면 되잖아요?'

'그럼 여기 사람들이 다 곤란해지잖아. 그건 싫어'

'그럼 따로 뭐 드시고 싶으신 건 없으세요?'

'딸기가 먹고 싶어. 하지만 그것도 괜히 말하긴 싫어. 나 때문에 다 곤란해지잖아'






할머니는 당신이 드시고 싶지 않은 '팥죽'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는 요양병원의 관리사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기에 당신의 취향을 죽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계신다.

팥죽은 '만들기 편하고' 비교적 '영양분이 풍부하고 먹이기 쉬운', 요양병원이 선호하는 음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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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호스피스에서 약 2주의 삶을 남겨놓은 할아버지의 식사는 달랐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훨씬 바쁜 호스피스의 의사,

간호사, 요양보호사 들이었겠지만 할아버지는 칼국수에 막걸리를 드시고 싶었고, 할아버지의 남은 시간을 생각했을 때 건강을 생각하면 말려야 하는 음식이지만 그들은 수고를 더하여 음식을 공수해다 드렸다.








*위 내용 모두 <나이듦에 대하여> 컨퍼런스의 '송병길'의료인류학자의 강의에 영감을 받아 전해드리는 이야기임을 다시 한번 언급합니다.



어째서 시스템이 나의 이 지극히 사소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가


앞서 말했다시피, 그들에게 차이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 확연한 차이를 만든 것은 '우리 삶에 있어 남은 시간'이다.


비교적 건강히 긴 시간을 요양원에서 보내는 할머니는 '돌봄 시스템'아래에서 당신의 취향을 내세울 수 없었고, 그렇게 삶의 마지막 순간에 들어서서 의료시스템마저 당신을 지켜낼 수 없을 때 할아버지는 비로소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두 공간의 차이는 확연했지만, 그럼에도 뚜렷한 공통점은, 두 공간에서 절대적인 결정권은 '나'보단 '의료 시스템'이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삶의 끝에 '의료시스템'의 영향력이 갑작스럽게 커진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이 공간이, 매우 단 시간에 바뀌었기 때문이다.

20C말까지만 해도, 근시대를 산 우리의 조상들은 10에 8-9은 자신이 평생 살아 온 집에서 마지막을 보냈고, 그 주변을 지켜온 것은 그를 잘 아는 가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빠른 근대화는 모든 것을 바꿨고, 그중에는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도 있었다.

우리는 단 몇십 년 만에 국민의 10에 8-9이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이 '집'에서 '의료기관'으로 바뀐 것이다.

이건 아무 근대화 속에서 변화한 모든 것들 중에 가장 급격한 변화 중 손꼽히는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 현상을 우리는 '돌봄의 의료화'라고 한다. 즉, 우리의 '나이듦-죽음'은 과거 그 어느 역사 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의료 시스템'과 밀접한 연결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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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나이 들고, 어떻게 죽는 가-에 대한 고민을 할 때, 마치 그것이 '나의 온전한 결정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상상해 온 두려움보다 조금 더 두려운 모습이었다.



대한민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발전해 왔다.

하지만 그 '빠름'속에 우리가 놓치는 것은 생각보다 많고, 그 놓침은 우리 인생의 긴 시간 어느 곳곳에 스며들어, 차마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어느 날 우리를 덮치고 무력하게 하나도.


우리는 의료시설을 빠르게 늘렸고 의료보험제도를 정착화시켰으나 그 빠른 변화 속에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 돌봄 시스템인가'에 대해선 사회적으로 충분한 논의를 하지 못했다.

그저 돌봄이 필요한 존재를 누일 병상의 수에 대한 논의를 했을 뿐이다.

논의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의료종사자들은 일손 부족에 시달리고 더욱더 '효율'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효율'에 끝의 끝에는 '돌봄'을 받는 노인들이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다.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사회 문제는 우리에게 미래를 정확히 보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상황을 맞이했을 때에는 - 정작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현실을 묵묵히 따라야 한다.


한겨례 : 숨 멈춰야 숨 멈춰야 해방되는 곳…기자가 뛰어든 요양원은 ‘감옥’이었다



어떤 제도와 역사가


나의 삶의 마지막 순간,


내가 딸기를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냐 없냐의


이 지극히 사소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가









우리가 눈에 담고 싶은 '비전'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떤 논의를 해야 하는가?

수많은 논의가 우리의 앞에 놓여있고 무엇부터 해결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비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올바른 미래의 모습이 어디까지인지, 어디까지가 현실로 가져올 수 있는 끝의 끝 모습인지를 다 함께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 더 나아간 방향의 논의를 할 수 있고 비전을 향한 우선순위를 세울 수 있다.


https://www.magazinemsv.com/Letter/?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4935834&t=board


즐겨 읽는 뉴스레터 중에 MSV가 있는데, 최근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을 소개해 주어 소개한다.

이곳은 네덜란드에 있는 '인지저하증'을 앓고 있는 노인들을 위해 마련된 요양시설이자 마을이다.

호그벡의 비전은 인지저하증 환자에게 가장 평범한 일상 만들어 주는 거였다고 한다. 때문에 공동설립자들은 인지환자들에게 폐쇄된 병동이 아닌, 가장 익숙한 환경에서 더 행복한 삶을 마주할 것이라고 믿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마을'에선 환자들은 '환자복'을 입지 않는다. 그들은 '마을의 구성원'으로서, 장도 보고, 볕도 쐬고, 인공호수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간병인들도 절대 '흰 가운'을 입지 않고 일상복을 입는다.

그 속에서 그들은 그저 서로가 서로를 챙기며 생활하는 동네 이웃이 되는 것이다.

출처 : msv
출처 : msv


환자가 아니라, 사람을 고민하자


호그벡 마을의 철학은 ‘환자가 아닌, 사람이 중심인 곳’이라고 한다.

우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환자'가 아니라 '사람'이고 싶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우리는 분명 모두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사람'으로 마지막을 보내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든 세상이 되었는가.

의료의 손길조차 닿지 못한 어느 곳에서 많은 삶은 조용히 끝나가고,

우리 사회는 아직 우리의 노년을 '환자'로 챙기기에도 급급할 뿐이다.


고령화시대, 우리에게 '노인'은 어떤 의미인가? 2

[고령화 시대, 우리에게 '노인'은 어떤 의미인가?- 상] 편에서 더 많이 언급했지만,

우리나라는 엄청난 속도로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한다.

좋든 싫든 우리 사회는 곧 어떤 방법이던 수많은 노인들을 챙기고 돌봐야 한다.

아마 당신도 나도, 시간을 돌리거나 멈추는 능력이 없다면 곧 그 돌봄의 객체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그때 이 사회는 당신과 나를

환자로 만나줄 것인가,

사람으로 만나줄 것인가.

고령화시대, 우리에게 '노인'은 어떤 의미인가? 인가? 2

출처 : m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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