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시각장애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촉각 전시를 봐야 하는 이유
시각은 우리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감각기관이다. 시각 정보는 나에게 항상 필요하고, 늘 최고로 유의미한 정보만을 전달한다. 시각이 없다면 나는 상당히 많은 정보를 놓칠 것이다
이 당연한 생각에 어쩌면 반례가 될 수 있는 순간을 찾은 하루를 보내게 되어, 이 경험을 글로 남긴다.
회사에서 ‘접근성’ 관련한 전시가 열렸다. 기존의 유명 명화들을 ‘촉감’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촉감전시였는데, 최근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시의 개념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 전시의 형태이기도 하다.
https://newsis.com/view/?id=NISX20230511_0002299966&cID=10810&pID=10800
과거에 이런 전시가 있다는 사실도 기사로만 몇 번 봤지, 한 번도 직접 찾아갈 생각은 하지 못했었는데,
회사 안에서 작품이 전시되어서 과제원 분들과 함께 관람하게 되었다.
유명한 명화들을 여러 재료들을 활용해 (천, 플라스틱, 종이, 실 등) 재해석하여 작품을 만들곤, 관람객들이 직접 만져가면서 관람하도록 하는 전시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전시를 처음 봤을 땐, 흥미가 전혀 없었다.
'이미 다 내가 아는 명화였기에 내가 굳이 촉각을 활용해서 만져본다 한 들,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멀뚱멀뚱 멀찍이 서서 그림을 보고 있었는데, 함께 관람하던 선배가 내 옆에 갑자기 불쑥 오시더니 손을 쭉 뻗으셨다. 그러곤 허공으로 손을 허우적 대면서 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선배는 아예 눈을 감고 그림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정석으로 관람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고는 나에게 지나가는 듯이 한마디를 던져주셨다.
‘그림을 최대한 보지 않고, 눈을 감고 상상하면서 보다가 눈을 뜨면 정말 느낌이 달라요.
글쎄, 이게 무슨 말일까.
이 말을 들었을 땐, 그 느낌이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나처럼 촉감 전시를 어색해하면서 그저 주변을 서성이는 회사 임직원들 사이에서 눈을 꼭 감고 손을 막 휘저으면서 작품을 찾기가 쑥스러웠다.
그래도 한 번 해보자. 굳이 회사에서 마련해 준 전시인데, 그리고 내가 하는 과제가 DEI와 관련이 있는 만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한 번 서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약간의 책임감이 함께 섞여 눈을 감고 작품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사실, ‘안 해봤으면 후회했겠다.’라는 생각이 든 건 눈을 감고 손을 뻗는 그 -
정말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서부터였다.
허공으로 손을 뻗고 작품을 찾는 순간부터가 신선한 경험이었다. 우선 캔버스의 크기가 얼마만큼인지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을 느끼기도 전에 그 자체에 대한 불안함이 생겼다. 나에게 가늠이 되지 않는 캔버스의 크기가 이렇게까지 불편하고 불안한 일일까?
본능적으로 내 손이 가장 먼저 찾으려고 한건 캔버스의 테두리였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의 시각을 사용할 때,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순차적인 단계 없이 한 큐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가 받아들일 정보의 양’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눈을 감으니, 한 큐에 들어오던 정보의 양이 갑자기 사라졌다. 내 손은 천천히 단계단계를 찾아가며 차분히 정보를 뜯어보려고 열심히 움직였다.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가 얼마만큼인가, 어느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 가.
캔버스의 크기를 확인하고 나서부턴 천천히 손이 닿는 대로 촉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눈을 감기 전, 어쩔 수 없이 스치듯이 봤던 이 <다혈질의 소녀>라는 작품에 있던 얼굴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내가 만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 작품의 기존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눈을 감고 손을 움직이다 보면 머릿속에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그려진다.
이 작품을 느끼면서 깨달은 건, 촉감 전시는 단순히 그림을 그대로 입체감 있게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 하나 안에서도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 여러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었고, 각 재료마다의 다른 '촉감'이 내 방황하는 손에 이정표가 되어준다.
'여기부터는 다른 그림이야.'
서로 다른 물질들의 촉감의 차이에 도움을 받아가면서 비록 실제의 모습과 조금은 다를지언정, 나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최소한 가운데의 ‘눈’ 동자가 유일하게 ‘맨질 맨질’하고 ‘딱딱’한 플라스틱 구슬이라는 점에서, 이 그림이 ‘얼굴’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이를 기준으로 다시 한번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이 그림 속 검은 선과 얼굴의 면을 표현한 물질이 비슷한 물질이었으면, 내가 과연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무언간 그렸겠지만, 그것은 완전히 다른 그림이었을 것이다.
관람 초기에는 내가 아는 명화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더듬는 부분이 어떤 부분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맞추기’에 집중하느라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중간쯤 가서는 살짝 현타가 오면서 의문이 생겼다. 나는 이미 대부분의 그림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 이렇게 퀴즈 맞추듯이 전시를 관람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의미를 생각할 때쯤, 나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작품을 눈을 감고 만지기 시작하면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아, 이 작품은 굉장히 차갑구나’
앞서 본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딱딱했고, 차가웠다. 앞서 만진 작품과는 달리, 눈동자가 만져지지 않고, 움푹 들어간 눈의 골격만 만져졌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아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만지기 전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새로운 느낌으로 작품이 와닿았다.
어쩌면, 정말 시각장애인이 촉감전시를 통해 얻어야 할 정보가 있다면, 세세한 작품의 형태와 색깔이 아닌, 그 작품이 전달하려고 하는 ‘감정’과 분위기가 아닐까.
그다음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 바로 이 샤갈의 ‘생일’이라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어서, 과거에 전시회를 가서 실제로 봤던 작품이었기에 눈을 감더라도 이 작품만큼은 크게 새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잘 알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가장 새롭게 느껴졌던 작품이다.
나는 한 번도, 이 사랑스러운 그림 속에 놀란 눈으로 남자의 키스를 받던 이 여성의 옷이 어떤 소재일까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던 꽃이 이렇게 다양한 종류로 이루어져서 풍성한 다발이었는지도 눈에 담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하고 있는 이 집안에 이렇게 다양한 가구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 다양한 가구들이 다채롭고 따뜻한 소재의 천들로 덮어져 있었는지도 ‘촉감’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아마 이는, 내가 이 전시를 통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정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시각’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한 번에 많은 정보를 얻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정보를 한 큐에 ‘처리’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놓치는 정보가 그만큼 더 많을 수 있다. 우리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다.
오히려 ‘시각’에 대한 의존을 잠시 접어두고, ‘촉각’에만 의지했을 때, 내가 볼 수 있었던 정보가 얼마나 더 많았는가. 과거엔 한 번도 생각하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 커플의 집 구조를 다시 한번 보게 되고,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이 얼마나 따뜻했을지, 그리고 이 풍성한 꽃을 들고 갑작스럽게 키스를 받은 그녀의 놀람이 얼굴의 2분의 1이나 차지할 정도로 표현된 눈을 통해 얼마나 행복하게 표현되고 있었는지를 보게 되었다.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보기만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