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투어Tour2

-한글박물관에서 남영동 대공분실까지

by 윤재훈

박물관 투어Tour2

-한글박물관에서 남영동 대공분실까지


이제 상설전시관으로 둘러볼 차례다. 맨 먼저

<자하 신위1769 탄생 250주년 기념 서화전, 자주빛 노을에 물들다>전이다.


20200114_114552자하 신위의 그림.png


우리 화단에서 가장 뜨거운 화가 중의 한 사람인 김정희(1786), 강세황(1713)과 더불어, 시, 서, 화에 모두 능해 조선시대 삼절에 속했던 <신위>,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세 가지 모두 최고 수준으로 성취한 인물은 그를 빼고 달리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특히나 대나무를 잘 그렸으며 그가 남긴 ‘묵죽도’, ‘경수당전고’ 등 25건 85점 유품이 이번에 전시되고 있었으며 그는 고전문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줄기가 가늘고 시원하게 여백를 남겨두는 대나무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3부자가 합작한 <시령도>라는 작품도 있다. ’, 강세황에게 묵죽을 배웠으며, 탄은 이정(1554), 수운 유덕장(1675) 등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도 유명하며, 당시 권세가들도 그의 그림을 얻기 위해 찾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


“그림보다도 가슴 속에 대나무를 완성하는 것이 먼저”,


라는 흉중성죽(胸中成竹)의 예술론을 폈는데, 예술에 앞서 먼저 인격을 닦아야 한다는 깊은 내면을 담고 있다.


다음 칸은 부자가 함께하는,

<손세기, 손창근 기증 명품 서화, 안복(眼福)를 나누다>전이다,


아버지 손세기와 아들 손창근은 대를 이어 수집한 문화제 202건 304점을 기증한 것을 기념하여 열리는 3번째 특별전이다. 이번 전시는 19세기 서화 수요층의 확장과 새로운 미감美感에 부응하며 김정희 및 직업 화가들이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했던 양상들을 조명한다. 무료 관람이지만 전시품 중 절반 이상이 최초로 공개하는 작품들이다. 앞서 개최된 두 차례의 기증전(2018. 11. 23. ~ 2019. 3. 24./2019. 3. 26. ~ 7. 7.)에서는 정선鄭敾(1676~1759), 김정희金正喜(1786~1856)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화가들의 명품을 선보였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는 초의선사의 소개로 김정희의 제자가 된 소치 허련(허유)이 만년에 그린 <노송도>가 전면에 붙어있다. 열 폭에 종이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꽉 채웠는데, 둥치의 껍질과 구불거리는 가지 표현 등에서 노년기에 완숙하고 거침없는 노치의 표현이 묻어나오는 듯하다.

김정희는 상당히 까탈스러운 성품이라고 하는데 스승이 제주도에서 9년간 유배생활을 할 때 3번이나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도합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스승을 모시며 그림에 매진을 했다. 하여 그는 스승으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소치 허련만한 화가가 없다.”라는 칭찬까지 받았다고 한다.

또한 시골의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신분상승의 욕구와 중앙문화계에서 인정받기를 갈망한 소치는 그 명사들과의 교유 내력을 자서전이 『몽연록-소치실록』과 『속연록-소치실록』에 자세히 남겼다.

추사를 따라 궁궐을 드나들며 <헌종>이 준 붓과 벼루로 그림을 그렸으며.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당대 최고의 세도가 안동 김씨 문중의 좌장 김흥근, 민영익 등과도 교류를 나눴다.


“눈 속에서 백 척 높이 우뚝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바람결에 긴 휘바람 소리 듣는다네.”

-노치(老癡)(허련이 만년에 사용한 호)


그 이외에도 여항(閭巷)문인이자 서화가인 정학교(1832), 묵란도를 많이 그린 명성황후의 외척인 민영익(1860), 기행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승업(1843), 서화와 금석학에 에 대한 연구 심화를 심화시키며 서화비평가이자 개화사상가인 오세창(1864)과 안중식(1861) 등의 작품이 눈여겨 볼만 하다. 19세기에 활동했던 서화가들의 개성적 면모와 상호간의 영향관계도 살펴볼 수 있으며, 2층 영상실에서는 앞서 보여주었던 두 차례 기증전의 대표적인 서화 작품들을 보여주는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세 번 째로는,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 소장품展>이다.


특히나 요즘 축구 감독 강항서의 영향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교류가 활성화 되고 서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또한 많은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오고 있으며 우리 국민이 두 번째로 많이 여행하는 나라이다. . 베트남은 동남아의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와 같은 대승불교를 믿는 국가이다. 전시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베트남 구석기 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베트남에 유구한 역사를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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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눈여겨 볼 것은 베트남의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청동북>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상징물로 여겨진다. 처음 악기의 일종으로 개발되었으나 점차 지배자의 권력의 상징물이 되고 종교행사의 의래용이 되었다가 무덤의 부장품을 거쳐 화패로까지 이용기능이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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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아미타 불상으로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베트남 국립박물관의 허락을 받아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존처리를 했다.


다음은 기획전시관으로,

<가야본성, 칼(劍)과 현(絃)>전이며 이곳부터는 유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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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과 화합’을 추구한 나라 가야, 가야금의 완벽한 하모니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나라. 철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칼과 갑옷을 만들었던 그들은 높은 철기문명의 수준으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였다.

가야는 <전기 가야연맹>과 <후기 가야연맹>을 유지하며 발전을 거듭해 갔다. 전기 가야연맹시기에는 삼한 중 하나인 한반도 중남부 현재 김해시 위치했던 변한의 금관가야(구야국42~532.490년)을 중심으로 변한의 12개 소국을 결집하며 성립되었다. 여기에서 마한의 백제국이 백제로, 변한의 구야국이 가야로 진한이 사로국이 신라로 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그러나 4세기 전반 이전 동북아시아의 국제시장으로 번영을 누린 가락국(구야국)이 왜 강자의 패권으로 가야를 통합하지 않았는지 많은 학자들에게 의문사항으로 남는다. 그후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가야연맹의 세력이 약화되자, 5·6세기 경 대가야(42~562년.520년 유지)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으로 개편된다.,국보 275호 기마인물형 뿔잔 등 2,600여점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특별전시관,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 - 핀란드 디자인 10 000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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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개관 이래 최초로 열린다는 북유럽 전시회, 인간, 물질, 변형으로 살펴본 핀란드 디자인의 오랜 세월을 볼 수 있으며, 일상에 녹아든 도구에서 내일의 디자인을 발견해 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라고 한다. ‘물질에서 도구로, 도구에서 디자인으로’, 핀란드 디자인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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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건축가 알바 알토의 <사보이 꽃병>, 피스카스 사의 <오랜시색 가위>, 마리에코사의 <요카보이카> 셔츠 등, 자연과 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반영된 핀란드의 보편성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서울여행20200109_174846옛집국수 가는길에 골목풍경.jpg

<옛집 국수> 가는 길에 간간히 이런 골목 풍경들이 펼쳐져, 아득한 옛 추억 속으로 잠기게 해준다..


<옛집 할머니국수집>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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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걸었더니 일행들도 이제 배가 고픈 모양이다. 지난번에 사전답사를 와서 특별히 눈여겨 보아둔 집이 있는데 모두들 그곳으로 가자고 한다. 삼각지역 바로 근처에 있어 그 골목을 돌아드니 한 아주머니가 이 길이 대구탕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대구탕집 간판이 붙은 식당이 서너 개 보인다. 어느 집에선가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다. 10여분 걸어 좁은 골목으로 접어드니 공터가 나오고 빙 둘러 허름한 식당들이 몰려있다. 대부분의 집들은 한가한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집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옛집 국수>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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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무려 45년이나 되었다는 집, 매스컴에 몇 번 주목을 받았다는 곳. 처음 이 자리에 탁자 4개로 시작 했다고 딸이 말한다. 지금은 아주머니 한 분을 데리고 운영하고 있다. 할머니는 이제 잘 나오시지 않는지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젊은 날 남편은 돌아가시고 아이들 셋 데리고 먹고살기가 막막하여 시작하였다고 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주다보니 그것에 감명에 받은 사람이 외국에서 성공하여 할머니를 찾기 위해 SBS 방송국에 연락하다 보니 유명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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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연 이래 대를 이어 이 자리에서 연탄불로 진하게 멸치 국물을 우려내고 있다고, 따님이 말한다. 어머니는 10년 넘게 국수값을 2천원에 묶어놓고, 면은 무한 리필로 주었다고 한다. 벽면을 보니 지금은 그래도 4000원으로 올랐나 보다. 지금은 가게 4개 합해서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좁았을까, 짐작이 간다. 여행은 낮술이 별미라 한 잔 하고 싶은데 술은 팔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여행20200109_194521삼각지역 근처 골목풍경.jpg

서울의 한복판 삼각지역에서 한 블럭만 들어가면 이런 골목길 풍경들이 펼쳐진다는 것에 놀랍다.


67년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or <전쟁기념관>

입구에서 들어서자 맨 먼저 보이는 것이 서로를 애절하게 안고 있는 <형제의 상>이다. 6,25 전쟁 당시 남측의 장교였던 형과 북측의 병사였던 동생이 전쟁터에서 운명적으로 만나 서로 얼싸안고 있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한민족의 슬픔을 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듯하다. 분단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큰 슬픔의 덩어리다. <남북이산찾기>에서 북에 있는 혈육을 애타게 찾는 모습들이 떠올라 가슴이 울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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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 동그랗게 가운데가 깨져서 상을 받치고 있는 것은 고분을 형상해 놓은 돔 모양이다. 그 찢어진 돔이 위로 갈수록 하나로 아물어지는 모습은 남북통일에 대한 소망이며, 전국에서 수집한 화강석 조각으로 쌓아 민족의 통합과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왁자지껄하며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온다. 그들에게 다가가 “니쉬 중구어 런 마?”하고 말을 거니 약간 경계하는 듯하더니 환하게 웃는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무기 박물관이라고 하더니 콘크리트로 쌓아놓은 하얀빛의 거대한 전면 광장은 햇빛에 반짝이며 커다란 분청사기접시라도 놓여있는 듯하다. 그 앞으로는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지원해 주었던 나라들과 육·해·공군의 깃발이 무리지어 펄럭이고 있었다. 가끔씩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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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 광장에도 전투기, 탱크, 대포를 비롯한 수많은 야전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초창기에 전통혼례예식장으로 쓰이던 곳은 어린이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원래 이 자리에는 대한민국 제 7보병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처음 창설된 위치이며, 바로 옆에는 국방부가 있고 근처에는 그것보다 훨씬 거대한 땅에 미군기지가 있다. 실은 국립박물관 바로 뒤쪽의 산으로 오며 이곳이 돌지 않고 훨씬 가까워 그렇게 오고 싶었지만 미국부대 철망들이 가로 막아 그렇게 올 수가 없었다. 해방 이후 70년 이상 이 땅을 차지하고 있다가 지금은 새로운 평택기지로 이전 중이다.

1층에는 일제 시대 과정까지 볼 수 있으며, 2층에는 6,25 전쟁 관련 자료들, 3층에는 유엔군 참전과 전쟁 관련 기념품, 해외파병, 군군 발전사 등을 볼 수 있다. <3D영화관>이 무료로 운영되고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보고가도 좋겠고 아이들과 함께 왔다면 <어린이 박물관>까지 가도 될 것 같다. 야외전시장에는 항공기와 함정 등이 볼만하다


75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용산공원 갤러리>>, 캠프 킴Camp Kim!


그대는 아시나오

서울 안에 캘리포니아 땅이 있는지!

나는 오늘 서울 여행 중에 캘리포니아 땅에 다녀왔습니다.

점점 한국으로 이전되고 있지만,

아직 미군부대 안에서는 카페나 식당 그 어느 것도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공존’은, 힘을 갖추었을 때만 유지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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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함에 따라 공원과 갤러리로 만들어 용산기지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 전시관으로 활용한다고 합니다. 1,900년 초반 건물로 추정되는 이 갤러리도 과거 일제시대에는 일본군 병영으로 사용하다가 미군이 주둔하면 주인이 바뀌어 우리 땅 안에서 남의 나라 건물로 한 세기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용산부대를 <캠프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영내에서 한국인 노무자들을 부를 때, 김씨가 가장 많은 듯하여 이름 대신 “김씨, 김씨” 부르다 보니 그리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민지 백성으로 살다가 보니 무슨 인권이나 자기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랄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후 해방이 되었지만 외세에 의해서 찾아온 해방은 다시 한민족의 한민족의 가슴을 갈라버렸습니다.

오만한 전쟁 승리자들의 이익에 의해 쑥대밭이 된 조국,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이었던 한국인들,


“ 이름도 없이 그림자처럼 김씨, 김씨,

그렇게 불리다가 굳어진 이름 “캠프킴”


아직도 영내는 캘리포니아주, 치외법권 지역이라,

만약 한국인 범인이 있다고 해도, 범인 인도협정을 받아야 한다고

대한민국 국토 내, 미국땅, 캘리포니아

우리는 오늘 그곳에 온 셈.

(만약 부대 내 버스투어를 원한다면 매달 한 번씩 용산문화원에서 추첨을 하니 신청하면 됩니다.)


서울여행20200114_160805할로윈데이를 즐기는 학생들,5,60대 영내밖 한국인들은 찢어질듯한 가난에 허덕일때 그들은.jpg


5, 60년대, 영내 밖 한국인들은 찢어질 듯한 가난에 허덕이며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할 때, 담 너머 미군부대 안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어른과 아이들 할 것 없이 <할로윈 데이>를 즐기며 한국에서의 추억 쌓기에 열광하고 있었다.


“저는 용산기지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용산기지에서의 시간은 정말 마법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항상 소중히 여기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다니앤 다너트, 1982년 SAES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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