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학적 유적으로,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고대문명이 독특한 자질을 보여주는 증거로 평가 된다’
(부서진 유적 위로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목민들이 많으며 계절에 따라 기후 차이가 큰 파르스 지방을 따라 남과 북으로 이동하며, 여름과 겨울을 지낸다. 파르스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지만 6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파르스 지역 유목민 중 가장 큰 집단인 <까쉬꺼이족Ghashghaees>은 유목민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며 터키어로 대화하고, 아랍Arabs 유목민들은 아랍어로 대화를 한다.
이런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시골마을들은 카페트Farsh, 길림Kilim, 갸베Gabbehr 같은 직물을 짜는 수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특히나 파르스 지역은 자연과 역사적인 유적 등 페르시아 문명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꼭 스쳐가는 곳이다.
이란은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에스파한을 추천하지만 이란인들은 페르세폴리스를 추천한다. 아마도 자국민들은 비록 지금은 그 잔해만 나뒹굴고 있지만, 그 돌무더기 하나하나에 새겨진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화려했던 영광을 되새기고 있는 모양이다.
원래 ‘페르시아인들의 도시’라는 뜻으로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파르사Parsa’라고 불렸으며, 이후 인류문명의 발상지라는 아크로폴리스를 세운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Perse인들의 도시Polis’라는 뜻으로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라고 말하였다. 이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이며, 현대 페르시아어로이란 문명의 증거 자체라고 하는 ‘타크테 잠쉬드Takht-e Jamshid’는 ‘잠쉬드 왕의 왕좌Throne of Jamshid’라는 뜻이다.
이름이 붙은 사연이 참 기구하다. 이 거대한 폴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파괴된 후 너무 오랫동안 방치 되어 있는 바람에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버렸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궁금해 하다가, 결국 전설상의 왕 ‘잠시드’의 궁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잠시드의 왕좌’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케메네스 왕조 때는 페르시아의 수도로 다리우스 1세 때인 기원전 518년부터 시작하여 계속 궁전들이 들어서고 온갖 보물들이 쌓여 부귀영화를 자랑했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린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곳을 점령한 뒤 방화로 파괴되었다. 이후 파르스의 중심지는 다른 곳이 되었고 페르세폴리스는 복구되지 않고 그대로 폐허로 남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페르세폴리스의 5km 북부에 있는 고대 도시 <이스타크르>는 페르세폴리스의 폐허로 쌓인 자재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이곳의 지배자이자 세습 영주였던 파르스 번왕이 파르티아를 전복시키고 세운 국가가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이며. 첫 수도가 된다. 이곳도 엄청난 유적지이지만 발굴은 지지부진하다.
현대에도 이란 최고의 경작지로 손꼽힐 만큼 본래부터 토지가 비옥한 지역이다 보니 사람들이 대대로 거주하였다. 16세기에도 아직 사람들이 거주하던 이스타크르 성곽에 반란군이 숨어들어간다던지 하는 일이 있었으며, 20세기에는 마르브다쉬트Marvdasht라는 도시가 건설되어 현지 주민들이 모여 거주하고 있다.
지금도 파르스 주에서는 시라즈 다음가는 대도시다. 마르프다쉬트의 이름도 연대가 수천 년씩 올라가기 때문에 학자들은 원래 이 지역의 이름이 마르프다쉬트인지 그냥 이스타크르나 페르세폴리스의 근교를 이르는 말이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이 도시는 13세기 쉬라즈의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에 의해 예술과 과학이 꽃피는 중심지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철저하게 부서진 제국.)
페르시아의 심장부라 일컫는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 ‘태양 아래 가장 부유했던 옛 도시’. 그곳으로 가는 길은 쉬러즈에서 북동쪽으로 40키로, 약 1시간 정도 황량한 도로를 달려야만 도착할 수 있다.
이란 최고의 유적지 <페르세폴리스>, 날은 건조하고 더우며 옛 도시는 나무 한 점 없는 야트막한 산기슭에 있다. 거대한 돌기둥들과 석상들이 왕조의 옛 터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앞쪽으로는 길게 가로수가 뻗어 있는데 조림한 것인지 원래 있던 것인지, 손차양을 하고 하늘만 올려다본다.
이란에서는 외국 여인도 무조건 히잡을 써야한다. 책보를 히잡 대신 쓰고 바람에 휘날리는 중국여인은, 마치 옛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에나 나온 순애보의 여주인공 같아 깔깔거렸다.
기원전 550년 키루스 대왕이 <메디아>를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창건했다.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바빌로니아 제국을 무너뜨림으로서 지구상 가장 강한 나라가 된 것이다.【윤재훈의 지구를 걷다③】페르시아 제국의 기원 '파사르가대'를 가다에 전편이 정리됨)
이후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하고 다리우스 1세 때 인더스 강에서 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함으로서,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 알려진 대부분의 문명세계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518년에 세워진 <페르세 폴리스Persepolis>는 세계를 호령하던 왕국을 품은 만인의 제국, <다리우스 1세>때부터 지어진 페르시아 제국의 궁전이다.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이집트를 재통일 한다. 지금까지 고고학적 탐사가 계속되고 있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기단에는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왕(기원전 486~465)에
이어 그의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기원전 465~424)가
98년 동안 3대에 걸쳐 왕궁을 만들었다.”
고 써 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유적까지 있어 기원전 518년 이전에 건설되었다는 도시로 추정된다. 최초로 이 도시를 정한 것은 <키루스 대왕>이지만 <다리우스 1세> 때부터 궁전과 테라스 등을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때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가 끝날 때까지 그 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페르시아 제국의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곳, 중국의 만리장성을 본 듯한 거대함은 없지만 그 시절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인들의 높은 건축적 안목과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세계인들도 그 가치를 인정하여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그 이유를 보면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학적 유적으로,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고대문명이 독특한 자질을 보여주는 증거로 평가된다"
(제국의 뜨락을 쓸쓸이 걷고 있는 후예들.)
해발 1600미터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쿠이 라흐마트Kuh-i-Rahmat(자비의 산)은 뙈약볕이 내리쬐고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먼지 이는 누런 벌판은 황량하기만 한데 입구 쪽을 바라보면 약간의 푸른빛이 보인다. 배산임야다. 어떻게 이런 척박한 땅에 수도를 건설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세계를 여행하면 할수록 우리의 자연에 탄복을 한다. 사계절 뚜렷하고, 어느 산골짜기에서나 물을 마실 수 있는, 평범한 것 같지만 세계에 이런 자연을 가진 나라들은 드물다. 물 한 동이 얻기 위해 찌는 듯한 아프리카 더위 아래 수십 km를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는 너무 많다.
한국에서 독일작가로 살아가는 <안톤 숄츠>도 ‘헬조선이 웬말이냐? 한국만한 나라도 없다’라고 일갈한다. “부족한 것을 모르는 것도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다.” 처음부터 풍족하게 살아와서 ‘왜 부족하지, 배고프면 라면 먹으면 되지’라고 되묻는 젊은이들도 있다고 한다.
코로나의 광풍도, 한국이 세계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은 것도, ‘빈자(貧者)의 철학’이 부족해서이지는 않을까? 하루에도 우리 집에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와 세재 양은, 우리가 과연 ‘생각하는 동물’인가 라는 생각을 멈추게 만든다.
“조국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바라기 이전에,
나는 조국을 위해, 이 지구촌을 위해,
조그만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까?”
는 과연 진부한 옛말이며, 낡은 이데올로기라고만 우리가 치부할 수 있을까?
(제국의 자존심 ‘만국의 문’을, 옛 사신처럼 고개를 조아리고 들어가 볼까.)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키루스 대왕에 의해 선택되었던 도시,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Darius, 550~486 BC) 왕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건축되어 왔으며, 군사, 제정, 연회, 왕의 거처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
입구 왼쪽 111개 돌계단을 올라가니 맨 먼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워 만국의 사신을 맞이했다는 ‘만국의 문(The Gate of All Nation다르바제 멜라)’이 나온다. 그의 이름을 따 ‘크세르크세스 문’이라고도 한다. 매년 초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이 아케메네스 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왕좌 홀the Throne Hall’로 가기 위해서는 이 문을 지나가야 한다.
계단을 보면 그들의 선진 석수(石手) 장인들의 능력과 위용을 엿볼 수 있다. 보통은 한 계단에 돌 한 덩어리씩 쌓은데, 여기는 커다란 통 돌을 다섯 계단으로 만들어 말을 타고도 불편함이 없이 오르도록 10센티 정도 높이로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정질을 하여 저렇게 올라갔을까. 쇠기둥을 갈아 바늘을 만드는 그들의 지고함을, 나는 쿠이 라흐마트 산기슭에 만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의 거대한 무덤 벽면을 보면서도 느꼈다.
입구는 좁은데 그 양쪽으로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거대한 황소 두 쌍인 상상 속 동물 <라마수Lamasu황소인간>가 우리를 압도한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악마를 몰아내는 신으로 몸은 황소에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수염을 기른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런 수인상(獸人像)은 아시리아 미술에서 발원한 것인데, 많이 훼손되어 있어 안타깝다. 짐승의 한 날개에서는 크세르크세스 1세에 관한 명문이 3가지 언어로 새겨졌다. 문은 바로 의장대 사열로와 연결되며 왼편에는 쌍두 독수리상이 노려보고 있다.
이들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4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 사이로 각국의 사신들이 거대한 석물을 올려다보면서 자신의 왜소함으로 처음부터 기가 눌렸겠다. 무너진 잡초와 대리석 틈으로 화려했던 제국의 영화를 2,500년이 넘도록 서럽게 반추하고 있다.
문득 500년 사직(社稷)을 뒤로하고 개성의 수창궁에서 신 군벌들에게 무너지며, 권불십년(權不十年)을 뼈저리게 경험했을 고려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500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어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야은 길제
박트리아Bactria, 바빌론Babylon, 페니키아Phoenicia, 에티오피아Ethiopia, 인도India, 아라코시아Arachosia 등의 대표단들이 4개의 기둥이 세워진 대형 홀에 들어가기 전 이문을 통과했다. 그들은 왕을 알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왕궁의 위엄이 서린 검은 대리석 벤치에 앉아 있었다. 서쪽 입구에는 한 쌍의 황소가 동쪽 입구에는 두 마리의 라마수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