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was in 노량진
기둥높이 72M에 육교길이 15M.
노량진역과 연결되어 건너편에 즐비한 학원가로 바로 연결해주는 다리.
모든 수험생은 노량진 육교를 거쳐야만 했다.
노량진 육교는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었다.
페인트칠은 다 바래서 벗겨졌으며, 다리는 무척 짧고 뭉툭하다.
색감은 또 구질하여 도시 경관을 더욱 음침하고 구질구질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철거했던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에는 길고 가느다란, 하얗고 새것 냄새 나는 다리였을테지만,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실용적인 측면도 있다. 아무래도 육교는 불편하니깐.
육교는 노약자와 장애인이 건너기에 배려한 시설물이 아니다.
1분 1초가 아까운 수험생들에게도 육교는, 길을 건너기 위해 시간을 지체해야 하는 불편한 시설물이다.
그러니 육교란 것은 대단히 실용적이지 못하고 사회편익적으로도 뒤떨어지는 사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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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4년전에 재수생활을 노량진에서 하였다.
8시에 노량진역에서 내려 육교를 걸어나와,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독서실에서 자습했다.
그리고 해가 저물고도 한참이 지난 밤 10시에 다시 육교를 건너 집을 향했다.
밤에는 늘 달이 배경으로 있었고, 그러나, 그 시간의 도시는 무척 적막하고 한적하였다.
그렇게 나뿐 아닌 모두가 육교를 건너 하루를 시작하고, 육교를 건너 하루를 마무리했다.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서. 그러나 늘 다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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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수험생은 고달프다.
마음이 가난하니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예리해진 감성은 주변 사물에 하나씩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 아마 육교가 있었던 35년간의 장고한 시간동안, 다리를 거쳐간
수없이 많은 수험생들은 다리에 자기만의 의미와 관념들을 부여했을 것이다.
수험생들의 집합소인 노량진은 독특하다. 그곳엔 정상적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단히 평범한 시험을 위해, 다들 몸도 마음도 병들어 간다.
그러니 아마 정상적인 것은 사물밖에 없는 거다.
그런 사람들에게 육교는 그나마 멀쩡하고 좋은 친구가 되어줄것만 같은 존재였다.
편하게 말할 사람도 따뜻한 위로 받을 곳도 없는 노량진의 차가움 속에서,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이제는 사물에게라도 따뜻함을 느껴보려 했을거다.
어쩌면 한낱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고, 또 상당히 비이성적이지만, 납득이 가는 행위이다.
내가 그랬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물론 그들은 대개 소시민이었을 것이고,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육교는 늘 그 자리에 서서, 소시민들이 자기에게 붙여주는 의미들을 곱씹으며 하루 하루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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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노라면, 정말 끝없이 먼 광경까지 바라볼 수 있어 참 좋다.
나는 그 다리위에서 여러 다짐들을 했고, 다짐을 잘 지킴과 관계없이,
그 장소를 향유할 수 있어서 나름의 기분전환이 되어 주었다.
육교를 걷는 것은 늘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체되지만 그정도는 괜찮았다.
우리는 늘 실용적인 것 틈 속에서 살아왔고, 하나쯤은 조금 불편해도 나름대로 낭만적이기에.
누군가를 다시는 볼수 없을 거라는 건 늘 슬프다. 사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4년전부터 나는 육교를 죽 향유해왔고, 육교가 철거됨으로써, 나는 나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나의 일부를 하나씩,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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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애란의 소설 『자오선을 지나갈 때』 중,
“1999년 봄 노량진 역. 우리는 햇살을 받아 마른 버짐처럼 하얗게 빛나는 육교 위에 앉아 농담처럼 그랬다. 되고 싶은 것? 대학생. 존경하는 사람? 대학생. 네 꿈도 내 꿈도 그러니까 대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