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1년
삶은 기억들의 연속이다.
우리 인생에 때로는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의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관점에 따라, 시간이 흐르면 괜찮은 추억들로 바뀌곤 한다.
1년 9개월간 양양군에서의 일들은 가끔씩 기억을 훑고 회상하게 하곤 한다.
누군가와 만나면, 특별히 남들보다 더 나을 것 없는 군대 얘기를 여전히 많이 늘어놓는다. 이제 축구 이야기만 더 늘어놓으면 전형적인 극혐 복학 선배의 완성이다.
아마 자꾸만 회상하게 되는 이유는, 어쩌면 어렴풋이 그 시절을 나의 리즈시절로 생각하고 있는 걸 지도 모르겠다. 큰 진통과 함께 좋은 성장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겐 아프지만 더 성장하게 하는 성장통과도 같았다.
나는 늘 '뽑기 운'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제법 운이 좋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운이란 괜찮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운이다. 당신들에게는 배울 점이 대단히 많았다.
"이 친구의 실수는 제 책임입니다."라고 말하는 상사는 여태껏 한 번도 사회에서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상사는 감동으로 자신에게 충성하게끔 하였다.
안 좋은 일을 맞이할 때, 분노보다 상황을 부드럽게 웃음으로 넘기는 선임이 있었다. 그는 분위기를 장악할 줄 알았다. 유머러스하게 매조 짓는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를 따라 나 또한, 쓸데없는 순간 분노를 참아 버릇하니 의외로 결과가 괜찮았다.
그뿐 아니다. 초등학생 때 이후 처음으로 많은 책을 읽을 시간이 있었고, 많은 고민과 생각을 더할 수 있었다. 그 시기는 20대 중반에 참 좋은 휴게소였다.
덕분에 많은 꿈을 품었다. 더 많이 성장하고 기대에 부푼 20대를 기대했다. 뜻대로 되는 일도 있었고,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많은 꿈을 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난감함을 겪기도, 때로는 부당한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나의 실체는 어둠 속으로 내몰렸다.
이등병 때의 일기들을 보면 나를 잃어버릴까 많은 두려움에 휩싸였던 당시가 새록하다. 내가 나로서 바로 서 있지 못할까 두려웠고, 변질되고 부패될까 두려웠다.
나의 육체는 이 편에, 나의 실체는 어둠의 저 편에 서있는 것만 같았다. 그 아득한 거리를 좁혀보고자 매일 밤 강물을 오고 갔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수많은 두려움이 요동쳤지만, 그리고 나의 자아를 위협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 고된 매일의 시간 속에서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수없이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 하나가 마지막 성루처럼 나를 지켜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수성하는 것은 그곳의 나와 고생을 함께한 동료들, 그리고 사회의 바쁜 일상 속에서 가끔이나마 나를 떠올려주는 고마운 사람들 덕분이었다.
2014년, 어느 휴가 中
"아, 근데 형. 요즘 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만약 인생이 케이크라면, 군대에서의 시간이 잃어버린 조각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많이 심란했어요. 그러니까... 완전히 무의미하고, 기억 저편으로 잊히는 2년이 돼버릴까 두려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런데 말야. 시간이 지나고 전역하면, 그 조각들을 아마 하나씩 되찾을 거야. 너의 케이크는 결코 사라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