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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했던 걸 자꾸만 잊어버려

진정 숨통 트이게 하는 것은 가까이에 있어

by 윤지아

우울증 치료에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긍정적인 생각하기'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강화시켜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올 공간을 없게 만들어야 한다.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서, 명상, 여행 등 뭐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나에게 여유를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1. 나는 천천히 걷는 걸 좋아한다.

2. 대화 중 찾아온 정적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를 좋아한다.

3.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4. 진심이 담긴 편지를 좋아한다.

5.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여유를 좋아한다.

6.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를 좋아한다.

7.

8..

9...

10....

좋아하는 것 10가지도 적기 힘들다니, 우울증은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자꾸만 잊어버리게 만든다.


정기적으로 가는 정신과 근처 공원 공터는 아주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고, 매번 그곳에 앉아있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다. 예약시간보다 한참 일찍 도착할 때면 이곳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한다.

어느 날처럼 예약시간보다 한참 일찍 도착하게 되어 그곳에 앉아 시간을 보내려는데 소복이 쌓인 눈이 뽀드득뽀드득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맞아, 나 이 소리 좋아했었지 이제야 생각났네. '

내가 좋아했던 게 무엇인지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또 깨달았다.

'그래, 이 겨울 냄새, 차가운 공기도 참 좋아했었어. '

좋아했던 것들이 나도 모르게 잊힌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슬픈 일이었다.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몰랐던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싫어하는 것도 딱히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는데 대체 뭘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나이 들면 선명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불투명해져 버렸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다가 애견미용실 창문을 통해 이제 막 미용을 마친 시츄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난 이제 어디로 가면 될까? 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다음 목적지를 생각하면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버스의 클락션 소리, 몇 초 남지 않은 신호등 소리, 쿵쿵 거리는 공사장 작업소리 등 온전히 혼자 있기에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건너편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까르르 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 시간, 이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여유만으로 오늘 하루를 버텼다.

그리 큰일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둘러보면 "내가 이 맛이 산다"라고 할 정도의 장면들이 있다. 세상 사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지만, 분명한 건 숨통 트이게 하는 것들은 항상 나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번에는 따릉이를 타고 지나가다가 청설모를 봤었는데, 혹시나 오늘도 볼 수 있을까 싶어 고개를 들어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애쓰며 둘러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고개만 아플 뿐, 가끔 봐야 봤을 때 더 반가운 법이니 실망하지 않기로 마음을 달랬다. 오히려 다음 만남에 더 반가운 마음이 클 테니까.

오늘 하루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만끽하며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안녕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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