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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살았어도 문제가 될까?

현대사회의 원시인

by 윤지아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온다.

내게 트라우마로 인한 과다각성, 우울장애 진단은 계절의 변화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의 사건은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내가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아직도 매일같이 자책하게 된다. 원망의 총구를 겨눌 곳을 찾지 못해 내 품에 꼭 껴안는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온전히 내 몫, 당기지 않는 것도 역시나 내 몫.


정신과에 갈 때마다 반복해서 하는 테스트가 있다. 새로운 테스트도 있지만, 반복해서 하는 테스트는 아무래도 그 부분에서는 나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정신과에 방문한 이후로 쭉 해오고 있는 테스트는 '반추적 반응 척도'에 대한 것이 있다.

'반추'는 우울의 핵심적인 인지처리 과정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우울증의 발병과 유지 및 재발의 위험인자로서 알려져 있다. 과거의 일을 생각하거나 자책하는 것은 우울증 환자의 특징 중 하나로, 반추적 반응 척도는 우울감을 지속 및 악화시키는 반추적 반응의 심각도를 말한다.

반추적 반응 척도 외에도 반복해서 하는 테스트로는, 간이 우울 증상 평가 척도와 파두아 증상 질문지가 있다.


간이 우울 증상 평가 척도

- 잠들기, 밤 동안 수면, 잠이 너무 일찍 깸, 잠을 너무 많이 잠

- 우울감, 식욕 감소 및 증가, 체중 감소 및 증가

- 정신 집중 및 의사 결정, 자신에 대한 견해,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생각

- 전반적 관심, 활력 정도, 느려진 느낌, 안절부절못하는 느낌


파두아 증상 질문지

- 의심이나 걱정이 맘에 떠오르면 나를 안심시켜 주는 사람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까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 옷을 입거나 벗거나 또는 씻을 때 특정 순서를 따라야 한다.

- 잠들기 전에 어떤 일을 정해진 순서로 해야 한다.

- 나는 필요 이상으로 자주 일을 계속 확인하는 경향이 있다.

-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조차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

- 내가 하는 부분의 일에 대하여 의시하고 문젯거리를 찾아낸다.

-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 내 의지와 관계없이 불쾌한 생각이 떠올라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 방심하거나 사소한 실수를 해서 끔찍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상상하곤 한다.

-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간이 우울 증상은 '종종 그렇다', 파두아 증상 질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그렇다'라는 선택지에 체크를 했다.

테스트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없는 문제를 왜 나만 가지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단점이라고 불릴만한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고 생각했다.

*문제: 해결하기 어렵거나 난처한 대상 또는 그런 일

오늘만 하더라도 내 문제를 열다섯 개나 발견했다. 적어도 하루에 열 개씩은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일 때도 많고,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스스로 묻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유독 나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은 규칙적으로 찾아오지 않고 불규칙하게 오기 때문에 주로 무방비상태일 때 느낀다는 것이다. 그럼 또다시 자책하게 되고 우울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반복되는 우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 봤다.

부정적인 생각 멈추기, 반대되는 긍정적인 생각하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등 내 생각을 통제하는 게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관점을 다르게 보기로 했다.

'내가 무인도에 살았어도 문제가 될까?'

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그 한 마디에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무인도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나의 단점은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인도에 살았다면 문제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덜 힘들어해도 될 것 같다.

내가 무기력하고 과거를 지나치게 후회하고 남의 시선을 유난히 신경 쓰는 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잡생각을 잊기 위해 생산성 없는 일을 하거나 혼자 있을 때 울고불고 이런 건 딱히 문제로 와닿진 않는다.

현대사회가 어느 무인도에 사는 원시인인 나를 좀 참아주기를,

원시인인 내가 현대사회를 무탈하게 견뎌내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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