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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택한다고 네 삶 안 무너져

저 퇴사하겠습니다

by 윤지아

대학시절 글쓰기 과제에서 A+를 받았다. 감상평과 같이 내 생각을 리포트로 써서 제출하는 과제에서는 늘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그 당시에는 글쓰기에 그다지 많은 노력이 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렵다는 걸 느낄 새도 없이 글 쓰는 데에 재미를 붙였기 때문일까.

야간작업을 하던 미대 실기실 다음으로 많이 방문한 곳이 도서관이었을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장르 편식은 심했지만 아주 많이 좋아했다. 책냄새, 종이 넘기는 소리, 조용한 공간이 주는 차분함 등 도서관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 대학 생활의 큰 힐링이었다.


대학시절 말버릇처럼 하던 '다음생에는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어.'라는 말은 아직 유효하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미대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해서 다른 것에 흥미를 느낄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걸로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고, 이제 시작해서 뭐 제대로 할 수 있겠나 싶어 시도조차 안 했다. 고작 스무 살을 조금 넘긴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포기가 어쩜 그리 빨랐는지, '현실과 이상은 다른 거야.'라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당연히 재능이 있으면 좋겠죠. 제일 이해 안 될 때가 한 20대 중반, 30대 초반 친구들이 '저는 재능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할 때 에요. 그럼 재능이 없는 거예요. 재능이 있으면 모를 수가 없어요. 어떻게든 재능이 비집고 나와요. 주변에서 다 알아보고요.
'너는 글을 잘 써.'
'너는 노래를 잘해.'
'달리기를 잘해.'
그렇게 100번은 넘게 들어봤어야 합니다.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혼자 몰래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럼 재능이 없는 거예요. 그럼 제가 하는 방법을 써야 해요. 엄청나게 노력해야죠.

- 작가 김은희


어느 인터뷰에서 김은희 작가가 말한 내용이다.

이 말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았다. 재능은 능력과 다르니까. 나에게 재능이 있다면 100번은 듣겠지라고 생각하며 100번 들을 때까지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일'을 숨겨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야 발휘하게 되는 능력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재능'이 아닌 '노력'으로 불러야 하는 것들이었지만, 끝까지 노력해서 결국에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면 '재능'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시간이 흐른 뒤, 글쓰기에 대해 동기부여를 준 사람들이 있다.

가장 많이 글에 대한 칭찬을 받았던 건 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다.

지인들에게 생일 또는 결혼 축하 메시지, 위로의 메시지 등 말로 하기 어려운 마음을 종종 편지에 담아 전달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네 편지에 정말 감동받았어.", "넌 글을 참 잘 쓴다." 등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내게 확실한 용기를 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전 직장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팀장님이다.

한 회사에서 5년 넘게 근무했다. 직장인으로 보낸 7년 중 5년 3개월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인들에게는 내 마지막 회사가 될 것 같다고 말하고 다녔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회사의 평판, 환경, 복지 등 최고는 아닐지라도 꽤 만족하며 다녔다.

비록 가슴 뛰는 일은 아닐지라도 이 정도 워라밸을 누릴 수 있다면 부족함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종종 내 글에 대한 좋은 평가를 들을 때면,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팀장님은 내가 다른 팀원들에게 건넨 문서를 보고 처음으로 글을 잘 쓴다고 말해주었다.

어느 부분에서 잘 썼다고 느꼈는지 짚어줄 정도로 투머치토커였기에 구체적인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팀원들에게는 깐깐하고 빈말 못하고 사회성 부족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인지라, 그런 팀장님의 칭찬은 다른 사람들에게 받았던 칭찬들보다 더 크게 와닿았다.

그 후로 종종 주 업무가 아닌 단체메일 보내는 일, 홍보 및 마케팅 자료에 쓰일 글을 부탁해서 가끔은 날 힘들게 하기도 했다. 내게 업무를 더 주려고 칭찬한 건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싫지만은 않았다.

야근을 해야 한다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글 쓰는 업무라 설레기도 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점점 가슴 뛰는 일을 맡게 되며, 하고 싶은 일에 더 몰두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칭찬은 싹에 물과 비료를 주는 역할을 하였고, 기분이 좋아진 나는 적절한 바람과 햇빛을 주었다.


항상 같은 날을 반복하던 K직장인이었던 나는 어느 순간 내게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보지 않고 있던 것이다. 아니 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저 내 선택에 대한 이유를 듣고 싶지 않아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돌아보니 내 안에는 수많은 소리가 갇혀있었고 메아리가 끊이질 않아 울림이 점점 커질 뿐이었다.

그제야 눈을 감고 내 마음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지아야, 그 선택한다고 네 삶 안 무너져.”

다음날 나는 사직서를 냈다.


퇴사 후 내 삶의 변화

늦잠을 잔다 /충분한 수면을 취한다

체중이 늘었다 /요리 실력이 늘었다

유행하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안 쓰는 물건이 줄었다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늘었다 /운동 시간도 늘었다

정신과를 다니게 되었다 /마음을 돌보게 되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연락하는 횟수가 늘었다


같은 상황, 같은 행동이더라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마음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던 그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최고의 회사도 없고 최악의 회사도 없으니까.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이 ‘처염상정’이라는 말을 했다. 척박한 환경에 있어도 향기를 내는 연꽃을 비유하는 말인데,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스스로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포기하면 그걸로 끝이다. 할 수 있는 것을 시도해 보는 건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니고 나를 위한 일이다. 그 결과가 어떻든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는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남들이 바라는 시선보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결과라는 것보다, 나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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