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속여보자!
나는 기억력이 좋다. 주변에서 "넌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내 기억력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생 때에는 내 기억력이 벼락치기 시험에 매우 강했다. 한때는 내 기억력을 믿고 시험 준비를 최대한 늦게 시작하기도 했을 만큼.
이렇게 기억력이 좋으면 살아가는 과정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살다 보면 힘든 일, 속상한 일이 종종 생긴다.
'오늘은 재수가 없네' 하고 잊어버리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되지만, 기억력이 좋으면 그 쓸데없는 기억도 수년간 가져간다. 애써 기억하려고 한 건 아닌데 머릿속에 박혀버렸다고 할까, 그 후로는 기억력이 좋은 것이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내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다면 나쁜 기억들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싶다.
내 바람이 이루어지는 건지 뭔지,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부터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다.
최근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정신과 다니기 전까지의 일은 더 과거의 일이지만 생생하다.
반대로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과거인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 후의 기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사소한 것들도 자주 깜빡하곤 했다.
처음에는 내가 바보가 된 건가 싶을 정도로 믿기 어려웠다.
립스틱, 지갑 등 사소한 물건 하나 잃어버린 적 없던 내가 고가의 브랜드 아우터를 잃어버리는가 하면, 방금 전까지 사용하던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려 "어디 갔니.."라는 말을 달고 살게 되었다.
그렇다고 멍청해졌다고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부정적인 것 같아서,
'모든 걸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된 걸 거야.' 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트라우마가 생긴 그날도 바꿀 수 없고, 우울증 진단을 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기억력이 나빠지고 있는 것도 막을 수 없다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괜찮지 않다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제는 문득 우울증 처방받은 내가 이렇게 웃어도 되나, 이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 때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나의 우울함을 감추기 위해, 보다 억지텐션을 올리며 밝게 행동했던 적이 있다.
전혀 즐겁지 않은데 괜찮은 척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킨 적도 있었다. 괜찮다고 생각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괜찮아, 괜찮아지고 있어, 괜찮아질 거야.'라고 되뇌며 내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
그래서 난 이제 쓸데없는 것에 많이 웃고 살아가려고 한다.
괜찮다고 나 자신을 속이려고.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니 별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빵빵 터지며 나 자신을 속일 생각이다. 언젠가 복이 오겠지?
며칠 전에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버스를 타려는데 지갑을 두고 나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약해 놓은 병원도 취소하고 그 후에 있는 약속시간도 조정하게 되었다.
"한 해가 바뀌어도 난 왜 이모양일까?"
내가 보낸 메시지에 친구가 답장을 보내왔다.
"원래 나쁜 기억력이 행복의 지름길이래"
기억력이 안 좋으면 나쁜 기억도 같이 잊어서 행복해진다는 말이었다.
친구의 답장을 곱씹으며 다짐했다.
앞으로는 뭐든 깊게 생각하지 말고 얕게 생각해서, 기억으로 저장되기 전에 훌훌 털어버리는 연습부터 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