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하는 거야, 그냥.
어른에게도 '그냥'이 필요하다.
*그냥: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따위가 없이.
초등학생 때 방학이 되면 스케치북 하나에 방학 때 있었던 일들을 그림으로 그리곤 했다.
어떤 날은 색연필로, 어떤 날은 크레파스로, 또 어떤 날은 물감으로 칠했다. 내가 원하는 재료를 쓰며 한 장씩 완성해 나가는 뿌듯함을 느끼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방학 기간 내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잘 그리고자 하는 욕심도 없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한 행동도 아니었다. 그저 방학이라 남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그림 그릴 때면 즐거웠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힘에 부칠 때면 어릴 적에 그림 그리며 즐거웠던 때를 떠올리며 힘을 내곤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갖게 된 나의 방학에는 비즈구슬을 가지고 놀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격한 운동은 싫고, 머리를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취미가 필요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비즈구슬을 꿰는 행동이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행이라는 비즈 키링도 만들고, 가방에 달린 모남희 인형에 목걸이를 달아주고, 친구들에게 팔찌와 반지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비즈는 왜 하는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플리마켓이나 스마트스토어에서 판매해 보는 건 어떠냐는 말과 함께.
1..2...3초 뒤에 대답했다.
"그냥 하는 거야."
비슷한 질문이 들어와도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어릴 적에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던 일도 이제는 설명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냥' 하는 일이 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건지 고민하던 시기에 친구에게 메시지를 한통 받았다.
"인생에 즐거움이 줄어든 것 같아."
워낙 이런 류의 대화를 많이 하는 사이라 당황하진 않았지만 답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내 인생에 즐거움도 줄어들었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이유를 물을 수도 없고 맞다 아니다 답할 수도 없었다.
어른이 되면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는 결과를 만들어 예상하려고 한다. 그 행동을 하는 이유도 필수.
소소한 취미를 하나 갖는다 해도 '이렇게 될 거야.'라는 목표부터 세우고 시작한다.
지난주에는 오래전에 사두었던 미니캔버스를 발견했다.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캔버스였다.
캔버스를 발견하곤 곧장 아크릴물감을 찾았다. 아크릴물감이 아직 굳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붓을 들었다. 스케치도 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캔버스를 채우던 그때의 난 초등학생 때로 돌아간 듯했다. 초등학생 때의 내가 그랬듯 잘하고자 하는 욕심도 없었고, 어떠한 결과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했고 그 과정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가장 근본적인 욕구는 즐거움이다.
탄탄한 기획이나 그럴싸한 내용, 타인의 컨펌이 없어도 내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을 담은 글이 하나씩 쌓이는 것이 내겐 큰 기쁨이다. 애초에 욕심으로 시작된 일이 아니라 부담되지도 않고, 쓰고 싶은 만큼만 쓰기 때문에 지칠 것도 없다. 오늘도 내일도 쓰고 싶은 글을 써 내가 즐거워할 시간을 주고 싶다.
어쩌면 어른에게는 어릴 적보다 더, '그냥' 하는 일이 필요하다.
팍팍한 삶과 건조한 마음에 단비를 내려줄 테니까. 잘하든 못하든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다.
목표도 대책도 없이 '그냥'이라는 말로, 마음껏 놀아보자.
왜냐고?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