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조 Dec 19. 2023

1999년 꿈에서 본 여자와 2023년 엄마가 죽은 해

꿈을 꿨다. 나는 새하얀 병실의 문 앞에 혼자 서있었다. 그곳은 3평 정도 되는 직사각형으로, 벽에는 액자 하나, 창문 하나 없었다. 오른쪽 모서리에 딱 붙인 작은 침대에 엄마가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작은 의자에 여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새카만 긴 머리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지만 나를 노려보는 그 눈이 너무 무서워 나는 자꾸만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 여자가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엄마를 쳐다볼 때마다 엄마 눈이 스르륵 감겼다. 직감적으로 엄마가 죽는 거라고 느낀 내가 “엄마! 엄마!” 하며 크게 외치면 간신히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그때마다 그 여자는 무서운 얼굴을 상냥하게 바꿨다. 엄마에게 미소 지으며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엄마 눈이 스르륵 감기면 그 여자는 또 무서운 얼굴로 변했고, 나는 또 간절히 간절히, 큰 목소리로 엄마를 외쳐 깨웠다. 그걸 수없이 반복하는 꿈이었다.


아침에 학교에 갔고, 하교시간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두꺼운 열쇠로 대문을 열고,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갔다. 아랫집엔 주인이 살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거실이 난장판이었다. 창문 선반에 일렬로 놓인 비싼 난들이 바닥에 처량하리만치 나뒹굴고 있었다. 발바닥에 동그랗고 딱딱한 작은 돌들이 밟혔다. TV도 깨져있었고, 리모컨과 담요, 베개, 무늬가 있던 나무 천장과 누렇게 변한 형광등까지 새빨간 물감 같은 게 튀어 있었다. 피라고 곧바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맑은 빨강이었다.


중간의 기억은 사라진 채로, 나는 꿈에서 본 것과는 다른 병실의 의자에 앉아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병실엔 창문과 꽃병이 있었다. 엄마는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눈은 뜨지 않았다.


그랬던 엄마가 올해, 23년에 죽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번엔 정말로 죽어버렸다. 새하얀 얼굴로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자주 봐서, 이번에도 그냥 조금 누워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 새하얀 얼굴이 더 새하얀 천으로 덮어졌다.


엄마의 일기를 읽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다 봤다. 속상할 때 일기를 쓰는 것은 유전인가 보다. 나는 생각이 활자로 쓰여있지 않으면 도저히 정리가 안 돼 어렸을 때부터 무슨 생각이든 글로 썼다. 특히나 나쁜 감정들은 꼭 써야만 마음이 진정됐고, 운이 좋으면 방법을 찾거나 회복하거나 잊을 수도 있다.

엄마가 죽기 단 며칠 전에 쓴 일기에는 ‘아직은 살고 싶나 봅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어떤 문장보다도 이 문장이 가장 마음이 쓰렸다.


나는 외로움을 안 타는 편이지만 엄마가 없는 세계에 산다는 건 외롭다. 살면서 처음으로 외롭다는 감정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외로움을 타지 않았던 건 육체를 가진 엄마의 존재 자체였을지 모른다.


죽은 엄마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숨이 막히도록 짜증 난다. 하지만 엄마 하나만을 생각하면 이번에 죽은 게 참 다행이고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차피 가망이 없는 인생이었다. 빚은 계속 더 늘었을 것이고, 아빠는 죽는 순간까지 정신을 못 차렸을 것이다. 평생을 몸도 마음도 아파한 것은 불쌍하지만 어쨌든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만은 부럽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현재 가장 큰 마음은 후련하다는 것. 슬프고 서러운 감정보다도 그게 더 큰 게 사실이다.


여러 가지 사건들로 더는 버티지 못하고 추석 이후로 아빠를 보지 않고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있다. 가끔씩 오는 편지와 문자는 여전히 나를 숨 막히게 한다. 몇십 년 동안 본 핑계 그대로이며, 거짓과 회유로 그득그득하다. 며칠 전에는 고작 벌금 몇 푼으로 아빠를 버렸냐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생활을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며 살았을까.


이제와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는 나에게 헌신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나보다는 자신의 고통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

엄마는 워낙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었다. 못되게 말한다고 할까, 가시 돋친 말로 상처를 주는 스타일이었다. 별 일도 아닌 일들을 가지고 나를 정신병자 취급했다. 취급이 아니라 실제로 정신병자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조기교육으로, 나도 마음만 먹으면 말로 사람을 죽이는 일 따위는 식은 죽 먹기도 아닌 정도의 일이다. 하지만 죽음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꽤나 미화시켜, 한동안 엄마에게 받은 상처는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빠가 돈을 훔쳐 도망가고, 돌아와 정신 차린 척을 하고 하고, 또다시 훔쳐 도망가는 걸 반복하는 동안, 엄마는 낙태를 내가 태어나기 전 두 번, 내가 태어난 후 세 번이나 했다. (내가 아는 것만 그렇다.) 과연 자궁이 멀쩡했을까. 중고등학교 때에는 엄마가 혼자 산부인과에 다녀왔던 게 기억난다. 아빠가 함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가 배를 부여잡고 새파란 입술을 깨물던 표정을 나는 아직도 꿈에서 본다.

술과 약을 매일 함께 먹고, 손목을 그은 것도 수차례인데 올해까지 살아있었던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혹은 지옥이다.)


처음으로 외삼촌에게 먼저 연락을 해 앞으로는 절대로 아빠를 도와주지 말라고 했다. 엄마가 죽었으니 아빠는 이제 남이다. 엄마는 결국 아빠 때문에 죽은 것이다. 평생을 힘들고 외로워했다. 실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아빠에게 돈을 갖다 바치느라 2월부터 9월까지 1,000만 원 이상을 썼다. 그리고 10월부터 지금까지 그 돈이 안 드니 이사 갈 돈이 모였다. 계속 갖다 바쳤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나는 아빠 차와 집까지 구해주려고 했으니, 아빠가 죽을 때까지 아마 평생 좋은 집으로 이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 이상 뭐가 급하다느니, 생활이 힘들다느니, 도와달라느니 그런 말에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평생 일하지 않고, 아내가 밤낮으로 일해서 번 돈을 도둑질하며, 도박 빚에, 본인 가족의 사채를 아내의 이름으로 들고, 폭력을 휘두르며, 뻑하면 몇 달, 몇 년씩 아이와 아내를 두고 도망 다녀 아이와 아내만 빚쟁이들에게 머리채를 잡히게 한 벌을 이제야 받는 것이다. 나를 갑자기 아빠를 버린 나쁜 딸 취급하는 것이 어이가 없는데, 더 외롭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해도 할 말이 없어야 인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8년에 엄마에 대해 쓴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