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안에 음식이 있는데 모르고 또 산적 있는가? 몇년전의 내가 그랬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며칠 전 분명 샀던 재료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샀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고 나서야 알았다. 이미 있었다는 걸.
그때의 나는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했었다.
'나는 정리를 못 해.정리정돈을 못하는 사람이야.'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건 정리의 문제가 아니었다.접근성의 문제였다.
냉장고는 기억을 시험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냉장고 안이 복잡해질수록 나는 냉장고를 덜 열게 됐다.
덜 열게 되니, 있는 음식이 기억나지 않았다.기억나지 않으니, 또 사게 됐다.
냉동실은 더했다.성에는 점점 두꺼워졌고,각 잡고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각 잡을 에너지는 없었고,그래서 계속 미뤘다. 게으름이 아니었다. 나에게 냉장고는 관리 대상이 아니라 회피 공간이 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정리를 포기했다. 대신 방향을 바꿨다. 잘 정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버리고,
접근성을 낮추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완벽하게 정리하지 않아도 있는 걸 또 사지 않게만 하자.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정했다.
그때 내가 선택한 아주 작은 액션 플랜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주일에 2번, 물티슈로 닦기만 한다.
정리하지 않는다.
꺼내고, 버리고, 배열하지 않는다.
그냥 눈에 보이는 곳만 닦는다.
깨끗해지면, 냉장고를 여는 심리적 저항이 줄어든다.
둘째. 냉장고 겉면에 화이트보드를 붙였다.
그리고 딱 이것만 적었다.
'지금 냉장고 안에 있는 것'
양배추, 달걀, 방울토마토, 닭가슴살.
냉장고를 열기 전에 이미 머릿속에 그림이 생긴다.
셋째. 견출지로 유통기한을 보이게 써붙였다.
유통기한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다. 기억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시스템의 일이다.
신기하게도 이런 변화가 생겼다. 장을 보러 가기 전에 냉장고를 열지 않게 됐다.같은 재료를 또 사는 일이 줄었다. 냉동실 성에가 대청소 대상이 아니라 조금씩 건드릴 수 있는 것이 됐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그때의 나는 정리가 안 되던 사람이 아니라,그때의 에너지가 냉장고 관리까지 할 여력이 없었던것 뿐이야.
삶이 벅찰 때 우리는 정리를 못 하는 게 아니다. 살아가는것만으로도 애쓰고 있는 중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님중 냉장고에 있는 걸 또 사고, 냉동실 성에를 보며 한숨 쉬는적 있다면.
스스로를 관리 못 하는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그건 성격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일 뿐이라고.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고.
오늘은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물티슈 한 장이면 충분하다. 화이트보드 한 줄이면 충분하다.
그 정도의 친절이면 우리의 일상은 다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