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나? 매일 가던 독서실에서 얼굴도 모르는 다른 학교의 학생에게 한 통의 편지를 전달받았다. 뜬금없는 이름이 적힌 봉투에 나는 흠칫 놀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그 아이. 한 번도 친했던 적도 없었던 생소한 이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는 못했던.
'정말 미안해.' 편지의 첫 줄을 읽고 눈앞이 흐려졌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동네에 사셨다. 우연히 걸어가다 선생님 눈에 뜨이면 나를 선생님 차에 태우고 학교에 같이 가곤 했다. 아마 이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우리 반 여자 아이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나를 째려보거나 왁스가 발린 마루 바닥으로 나를 슬쩍 밀치기도 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냉정하게 내가 바라본 그때의 나는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내편인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 그중에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스파이가 될게. 쟤네들이 너에 대해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올게. 그래서 말인데 내가 쟤네랑 친하게 지내도 나한테 기분 나빠하면 안 돼." 정말이었을까? 스파이 활동이란 것이? 어쩌면 나를 떠날 구실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6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나를 미워하던 그룹 중에 A라는 아이가 갑자기 집에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에 늘 나오는 장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좋아졌나 보네. 그렇지, 내가 알고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이지. 훗, 어린이 다운 참 명랑한 생각. 나는 종종 A와 집에도 같이 걸어가고 떡볶이도 사 먹고 숙제도 같이 했다. A가 나에게 어떤 거리감을 두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냥 A를 친구라고 생각했다. 우정의 깊이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베스트 프렌트는 아닐 테니.
그렇게 나를 미워하던 그룹의 애들도 나를 미워하는 것에 흥미를 잃어 가고 있던 어느 날. A가 물었다. " 나 너네 집에 가도 돼? 너는 우리 집에 와 봤는데, 너네 집엔 왜 날 안 데려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나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갈 수 없었다. 우리 집에는 아픈 아빠가 있었으니까. 언제 들릴지 모를 아빠의 신음 소리를 들킬 수 없으니까. 식물인간이라고 믿고 있던 나의 초록색 아빠가 거대한 화분에서 자고 있었으니까.
"너는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아?" A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뭔가 작정을 한 듯 도전적인 말투였다. 때마침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을 타고 나는 가을 노래라도 하듯 말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우리 아빠는 식물이야. 그래서 안돼. 아빠가 집에 있어. 너랑 우리 집엔 못 가."
지금도 가끔 나는 그 가을의 나를 생각한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게 비밀이라고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다. 내 깊은 마음의 바닥을 털어놓을 만큼 친한 친구도 아니었는데 나는 왜 하필 A에게 그런 수상한 고백을 했을까.
그 말을 하고 그다음 날이 되었다. 나는 어수선한 교실에서 동그랗게 모여 있던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을 보았다. 그 중앙엔 A가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한 번씩 나를 쳐다보았다. 곧 내 스파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스파이 친구가 귀까지 새 빨개진 나의 어깨를 짚었다. "재네들이 네 얘기를 하고 있어."
사실 내 잘못이 맞다. 아빠가 식물인간이라니. 그렇게 흥미로운 단어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내가 자초한 일이 맞다. 나는 비밀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울지도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맥없이 무너졌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이어지지도 않는 말을 고장 난 라디오처럼 늘어놓았다. 나는 어린아이였다. 마침내 엉엉 울고 말았다. 엄마는 큰 충격을 받으셨고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담임 선생님은 솔직히 나를 특별히 예뻐하신 게 맞는 것도 같다. 선생님은 엄마의 전화 한 통을 받으시고 몹시 심하게! 화가 나셨다. 나는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지만 이미 사건은 시작돼 버렸다. 선생님은 주동자가 누구냐고 하셨다. 아침 자습 시간부터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흥분한 선생님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워~워~ 제발요. 하지만 선생님은 몇 명의 여자 아이들을 불러 교단 앞에 세웠다. 아이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선생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제발 이제 그만. 나는 철저히 가엾어졌다. 할 수 없이 눈물이 철철 흘렀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작은 어깨가 지쳐갈 때쯤 나는 그 일을 가슴에 묻었다.
나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준 그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 애는 동그랗게 모여 있던 여자 아이들 중의 한 명일뿐이었다. A가 떠드는 흥미로운 얘기에 귀를 좀 기울였을 뿐이었다. 물론 나를 싫어했던 건 맞지만.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조용히 울고 있다. 어린 시절의 일인데 뭐 어때 그런 말 다 거짓말이다.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꽤 아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