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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경 Oct 18. 2022

한 때 멋 좀 부렸지

옷장 속 깊은 곳에 놓여 있던 하얀 플라스틱 박스 3개를 열었다. "오 마이 갓!" 딸아이가 난리를 치며 박스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내가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에 입었던 여름옷들과 액세서리들이 들어 있었다. 언젠가 정리를 해서 버려야지 했던 것들이었는데 이사 올 때도 그냥 통째로 들고 왔고 그러다 또 세월이 흘러 버렸다. 딸아이가 체격이 나와 비슷해지면서 호시탐탐 엄마 옷을 노리던 터라 때는 이 때다 싶어 옷 정리를 하기로 했다. 버린다고 버렸는데도 남아 있는, 차마 못 버린 옷들이었다.


나는 20대 중반, 뉴욕에서 미술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여름 맨해튼 다운타운 소호에 있는 한 인테리어 회사의 여름 인턴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솔직히 말주변도 없고 심하게 내성적인 데다가 영어도 버벅대는 나를 뽑아 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름 3개월만 하기로 하고 시작한 거였지만 윌 스미스랑 똑같이 생긴 아트 디렉터는 내 포트폴리오에 와우! 와우! 막 오버를 했고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채용되었다. 헐, 인터뷰 이렇게 하는 게 맞아? ㅋㅋ 지금 생각해 봐도 좀 수상하다. 뭐 그분이 그날 유독 기분 째지는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싶다. 여하튼 나는 인터뷰를 마치고 그다음 날부터 쇼핑의 거리 맨해튼 소호로 매일 출근을 했다.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프린스 스트리트에 내려 5분만 걸으면 회사가 나온다. 그 5분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스토어들을 지나치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늘은 이 집이네! 아침부터 세일 광고를 유리에 붙이고 있는 가게들을 일등으로 확인. 야호! 점심시간이 되길 기다리는 것이다.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었는데 붙임성 없는 나는 오피스에 앉아 동료들과 떠드는 게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밖으로 사라지곤 했다. 물론 몇 번은 붙잡혀서 다 같이 시켜 먹는 런치에 동참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말에 따르면 점심시간마다 내가 고스트처럼 없어진다고 했다. 가끔 서로 물어본다고. 새로 온 그 애는 어딨어? 벌써 나갔어? 


런치타임은 나의 작은 행복이었다. 이른 아침에 본 그 글씨. 세일이라고 쓴 그 옷집으로 전진! 개성 있는 작은 옷가게들은 매일 들러도 전혀 질리지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온라인 쇼핑이 거의 없던 때였다. 나는 세일 첫날부터 그 가게를 샅샅이 뒤지고 너무 좋은 가격의 옷들을 일등으로 살 수 있었다. 어차피 나에게 점심시간 1시간은 너무 길었고 작은 라테 한잔에 쿠키 하나만 먹어도 배는 대충 불렀다. 나는 점심 쇼핑을 마치고 종종 작은 쇼핑백들을 밑으로 축 늘어트린 채, 발 없는 유령처럼 휘리릭 오피스로 컴백했다. 내가 일하던 책상은 다행히도 구석진 곳이어서 발밑에 쇼핑백들을 쌓아 두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어카운팅 쪽 일을 하던 상냥한 조세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어디서 쇼핑해? 네 아웃핏이 너무 맘에 들어" 그녀는 내 카디건을 막 들추면서 옷감이 귀엽다는 둥 단추가 특이하다는 둥 수다를 떨더니 나랑 같이 쇼핑을 가야겠다고 언제 갈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 그 질문이 급 부담스러웠지만 오늘 당장 갈 수 있단다라고 후다닥 대답했다. 원래 숙제가 쌓이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던 탓? 나는 그날 조세핀과 함께 귀여운 카디건을 사러 Cynthia Rowley라는 옷가게로 쇼핑을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말 귀여운 스웨터를 득템 했고 나도 민트색 체크무늬의 끈달이 원피스를 세일 가격에 샀다.


딸아이가 하얀 박스 속에서 민트색 체크무늬 원피스를 꺼냈다. "오 마이 갓! 너무 귀여워!" 요즘 빈티지에 빠져 있는 딸은 마치 엄청난 보물 상자라도 찾은 듯 호들갑을 떨었다. 옷들은 다 손바닥 만한 사이즈여서 딸아이에게 좀 타이트하게 맞았지만 그래도 좋은지 패션쇼를 하고 난리였다. "엄마 이건 돌체 앤 가바나야!" "우와! 미우미우 청자켓이네?" "디젤 청바지다!" 틴에이져 딸의 감탄은 계속되었다. 


그땐 그랬지. 정말 쇼핑에 진심이었지. 한 때 멋 좀 부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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