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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일북클럽 Sep 12. 2018

어떤 여행

시어머니와, 친정아버지와 단 둘이 만들어가는 추억여행

J는 가끔 만나지만, 헤어져 돌아서면 어릴 적 바닷가에서 주운 소라껍데기가 내 손에 다시 쥐어진 기분이 들게 하는, 내 오래된 친구이다. 감정의 폭이 크고, 늘 흔들리는 나와는 달리, 학창 시절 엄마의 병간호와 죽음, 이후 일찍 결혼하고 떠난 이국생활 등을 겪은 그녀는 한 번도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눈물짓거나 하질 않았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두 딸을 성인으로 다 키워내기까지 온갖 희로애락을 겪으면서도 그 성정은 한결같았다.


올해 초, 둘이 이런저런 근황은 나누는 중에, 아이들도 이젠 다 컸고, 뭐 하면서 지내냐는 물음에, 시간 나는 대로 당일치기 국내여행을 하고 있다는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 때론 그 이상을. 어디로, 누구와 라는 거듭된 질문에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J가 결혼할 당시 모두가 만류하던 홀시어머니에 외아들의, 그 팔순이 넘으신 시어머니와,

그의 학창 시절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쭉 혼자이신 팔순의 친정아버지와,

각각 자동차로 두어 시간 내외의 어디든,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거다. 요일과 장소는 미리 정하지 않고, 남편이 차를 쓰지 않는 날, 두 분께 교대로 전화를 드린 후, 드라이브를 나간다고 한다. 그새 제법 서울 근교, 멀리는 강원도까지 나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여행지를 많이 다녀온 듯하다.


시어머니와 단둘이서? 왜? 어색하지 않아? 쉽지 않은 어른이잖아? 널 많이 힘들게도 하셨던... 그런 뻔한 질문들이 머릿속에 금방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이 그냥 내 마음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런 여행을 하고 있었구나,라고 툭 던졌을 뿐이다.

결혼해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남편과 동반하는 식사자리에서, 시어머니는 항상아들이 무엇을 먹고 싶은지만 물었고, 아들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만 눈길을 두셨다고 한다. 그래서 늘 식사자리가 싫고, 화가 많이 났었다고.

그런데. 둘이 여행할 땐 시어머니도, 그녀도, 각자 자신이 먹고 싶은 걸 고르고, 그걸 온전히 즐기고 있는 그 시간이 참 좋다고.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런 시간을 시어머니와 자신에게 선물한 그를 꽉 안아주고 싶었다.


게다가 친정아버지와 둘만의 여행이라니.

어쩌면 시어머니와의 여행보다도 우리 세대에겐 더 낯설고 쉽지 않은 일이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가장의 무거운 책무만이 어깨를 짓눌렀던 우리네 아버지들은 대개 말이 없고, 자식과의 소통은 일방적이기 일쑤였다. 늙어가는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은 커져가는 데 비해 대면 대면한 관계는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가 딸의 전화를 설레며 기다리고, 함께 풍경을 보며 감탄하고, 서로 맛있는 걸 권하는 모습이라니. J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행복한 상상을 펼친다. 사랑하는 내 친구.


뭐 달리 하는 일도 없고, 시간이 많잖아, 게다가 가끔 차를 쓸 수 있으니까, 그래서 하는 거야... 헐렁한 교복 치마를 펄럭이며 다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게 단 한 번도, 한 번쯤은 할법한 자랑이나, 불평 한마디 해본 적 없는 그 다운 대답이다.


차고 넘치는 여행에 관한 정보, 에세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화려하고 감각적인 사진과 동영상들 속에서 어느새 내 감흥은 시들시들해져 가는데...


모처럼 듣게 된 J의 여행 이야기는,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놓치고 있던 소중한 감성을 일깨워준,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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