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여행 프로젝트 1탄
우여곡절 끝에, 일주일의 국토 종주에서 2박 3일의 섬진강 종주로, 파트너도 딸아이에서 남편으로 바뀌었다.
예기치 못한 일은 늘 있는 법.
아이의 아쉬움과 응원을 뒤로하고 섬진강을 향해 일단 출발.
여행을 떠날 때 늘 그랬듯이, 준비는 미흡하고, 발걸음을 잡는 일은 많지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주저 없이 떠나기로 한다.
국토종주보다는 부담이 훨씬 덜한 일정이기도 하고, 지인들로부터 들은 4월의 섬진강에 대한 감탄도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편한 동네 복장에, 길 건너 따릉이를 이용하던 우리가, 헬맷과 라이딩 복장을 갖춘 채 투어링용 자전거에 오르고 나니, 우리도 ‘라이더’의 자격(?)을 갖춘 기분이 든다.
집에서 남부터미널까지 40분 정도의 라이딩.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를 아슬아슬 비켜지나 간다.
우리도 한때는 저 무리 속에 있었는데.
30분 일찍 도착한 버스터미널. 주말이 아니기에 여행객들보다는 서울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귀향객, 혹은 업무차 지방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다. 터미널에서도 튀는 우리.
8시 30분 임실행 버스,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 우리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힐끗 보는 기사님 눈치를 보며 짐칸에 자전거를 실었다. 그동안 들었던 정보와는 달리, 자전거 싣기가 만만치 않다. 기사님 눈치도 봐야 하고, 상황에 따라 앞바퀴를 떼야하는 경우도 있다. 승객이 많지 않은 평일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터미널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첫 관문을 무사통과했다는 안도감과 졸음이 밀려온다.
아, 정말이지 너무 아름답다, 라는 감탄사가 쉼 없이 터져 나오는 풍경에 자전거를 멈추고 타기를 반복한다. 4월의 섬진강을 보러 오길 정말 잘했어. 사진에 다 담지 못하는 섬진강의 조각 같은 바위, 물소리, 바람, 햇살, 연초록 풍경과 드문드문 드리워진 낚싯대... 시간이 멈춘듯한 그 풍경 속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임실역에서 28킬로의 국도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도착한 덕치면, 섬진강 자전거 종주 시작점부터 우리 둘만 너른 간격을 둔 채 달리고 있는 중이다.
산책을 할 때도, 산을 오를 때도, 그리고 이렇게 자전거를 탈 때도 그이는 늘 저만치 앞질러 간다. 길에 대한 본능적 감각이 있는 그이의 뒤만 따라다니면 되니 난 편하다.
하지만, 한때는 나란히 걸으며 얘기를 나누고 눈을 맞추는 부부를 보면서 화가 나 울기도 했다. 부부란 저런 거야. 같은 속도로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거야. 라며 우리는 왜 그렇지 않은가를 원망했다. 가족이라면 이래야 하는 거야, 엄마는 이래야 돼, 남편은, 자식은... 오랜 기간 세뇌된 ‘행복한’ ‘바람직한’의 원형이 갖는 배타성을 늦도록 알지 못했다. 때로는 희생자 코스프레까지 하며 스스로를 소외시킬 때도 있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원형들을 깨기까지 많은 고통이 있었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니 지금은 자유롭다.
나의 패들링으로 굴러가는 바퀴소리, 섬진강 물이 흐르는 소리,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처럼.
곡성에 들어서자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영화 곡성에서 느껴지던 으스스한 기운과는 달리, 부드러운 능선과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 논둑길과 색색의 꽃들이 아기자기하고 포근하다. 어쨌든 우린 초보자이니,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구례로 향하는 어둑해진 국도 앞에서 멈추기로 한다. 곡성의 끝에서. 낚시 중이던 주인아저씨가 안내한 펜션의 2층은 아늑하고 정갈하다. 소개해주신 근처 식당의 재첩국도 만족스럽다. 식당과 나란히 붙은 편의점에서 과자와 막걸리 한 병을 사서 돌아오는 길, 고개를 들어 쳐다본 밤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한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충족감이다. 방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깨끗한 침구에 드러누워, 군것질까지 할 생각 하니 마냥 신나는 기분. 그러다 어느새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몸이 천근만근에, 얼굴은 퉁퉁 부어있다. 오늘도 100킬로를 달려야 하는데... 다행히도 오늘이면 완주다. 바이크 샵에서 자전거를 구입하면서, 천진한 얼굴로 ‘국토종주하려고요’라고 말하자, 황당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 한 실장님 얼굴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어쩌다 날이 좋아서 ‘한번 나가볼까’의 여유 있는 라이딩과는 하늘과 땅 차이. 녹초가 되도록 뛰고 나면 끝이 아니라,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동일한 체력소모를 해야 한다는 건, 정말 차원이 다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그게 바로 나였다.
그래도 일단 페달을 굴리다 보니, 가속이 붙고 정신이 차려진다. 구례를 지나 남도대교에 도착해서 은어튀김과 재첩국으로 늦은 아침을 먹었다. 서울에 사는 아들, 딸을 가끔 보러 가신다며 반가워하는 주인 부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느긋함을 잠시 누려본다. 어제와는 달리, 국도의 긴 나무터널을 지난다. 4월의 나무들은 청량함으로 나를 물들이는 것만 같다. 연 초록빛 사이로 물결처럼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 이어서 광양에 진입하니 환상적인 매화나무길이 펼쳐진다.
자전거 여행이라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있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처럼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로 한가로이 바퀴를 굴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엉덩이, 무릎, 어깨, 팔목 등 신체적 고통이 엄청나지만. 게다가 자전거도 일종의 장비이기 때문에 도움 없이, 스스로 컨트롤해야만 하는 번거로움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움들을 감수하게 하는 탁월한 장점이란.
재작년 제주도 자동차 여행은 못내 아쉬웠다. 나이 든 엄마를 모시고 간 여행이라 편안함이 최우선이었지만, 제주의 풍광을 차로 휙휙 스쳐 지나가니, 아, 아름답다, 라는 감탄사가 입에서 나오자마자, 풍경이 저만치 사라져 버림에 얼마나 아쉽던지.
시속 60킬로의 속도로 지나치는 풍경과 시속 20킬로의 속도로 지나가는 풍경은 사뭇 다르다.
섬진강 물소리와 자전거 바퀴소리의 합주를 들으며, 이따금씩 마주치는, 홀로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 느릿느릿 걸어가는 강아지, 고양이들, 밭일을 하다가 앉아서 잠시 쉬는 이들, 작은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가 드리운 그늘, 밟을까 봐 살짝 핸들을 꺾게 되는 길 위의 벌레들, 꽉 잡은 핸들에서 잠시 손을 뻗으면 닿는 매화나무 잎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풍경, 오후가 될수록 길어져 나와 함께 달리는 내 그림자, 석양에 반사되어 흔들리는 갈대,
그렇게, 멈춰버린 시공간을 달리는 듯한 비현실과 시공간의 미세한 변화가 그대로 내 안에 스며드는 일체감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었다.
쓴맛보다는 달콤함이 더 컸던 섬진강 종주를 마치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