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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일북클럽 Oct 12. 2017

가을날, 두 번의 산책

가을 날에, 기억의 창고가 있다면 간직하고 싶은  두 번의 산책이 있었다. 모두 갑자기 이루어진.


소울메이트라는 말이 쉽게 떠올려지는 선배 M과는 지난 봄날에 도시락을 싸들고 이팝나무가 줄지어선 한적한 오솔길을 걸었다. 어린아이들의 소풍처럼 좋아했던 우리는 가을에도 이런 시간을 갖자고, 혹은 가질수 있을까 하는 반반의 마음을 나누며 헤어졌다. 그러다 그 반반의 확률로 봄날보다 더 좋은 날씨에 더 좋은 공간에서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두어 번은 벤치에 앉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토스트를 먹었다. 각자 좋은 일도 한두가지 있었고, 좋지 않은 일은 더 많았지만, 모두가 광장으로 나가버려  텅 빈, 아늑한 정원의 나무탁자와 의자, 손바느질의 정갈한 매트, 도자기잔에 담긴 커피, 접시위의 포도 한송이, 잘라낸 빵과 나이프를,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과 나뭇잎 사이로 비쳐지는 햇살과 적당한 온기와 바람으로 봉인해서 우리에게만 오롯이 주어진 그 선물같은 시간이면 충분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감정의 셈없이 생각나는대로 아무 얘기나 툭 던지면, 기분 좋을 만큼의 가벼움으로 되돌아오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느라 대화가 끊겨도, 딴 생각에 빠져 멍하니 있어도, 다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말들...과하지  않게 서로에게 먼저 권하고, 맛있게 나누는 담백하고 소박한 간식들.

현재를 그대로 들숨과 날숨으로 마시고 내뱉던 순간이었다.


석달째 주 6일을 오고가는 죽전역을 일터로만 받아들이는 건 너무  삭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날씨가 좋은 요즘 조금 일찍 도착해서 걷거나, 퇴근길을 일부러 돌아 걷기도 한다. 그러다 모처럼 이른 오후의 퇴근길에 탄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시 기온이 올라간 날씨 탓에 자켓은 벗어서 손에 들고 이것저것 많이 넣고 다니는 무거운 가방을 멘 어깨는 좀 짓눌려 졌지만, 보드를 타는 아이들, 자전거 타는 사람들, 산책하는 노인들을 한가로이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그러다 인근에 사는 친구 J와  연락이 닿아 중간쯤에 만나 함께 산책을 이어갔다. 드물게 만나는 사이이고, 한동안은 연락이 끊겼던 친구이다. 성격과 취향이 다르고, 서로에게 한번에 다가서지 못하는 거리감이 좀 있었다. 그래도 대화를 할 때, 적확하고   위트있는 단어의 선택, 부담스럽지 않은 응시, 서두르지 않고 먼저 한두번의 긴 호흡후의 대꾸등...기분 좋은 대화상대라는 호감은 서로에게 있어왔던 것 같다. 시월에 우연히 시작된 둘만의 긴 산책은 손을 잡지 않았는데도 서로에게  닿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예의를 갖춘 거리감에서 서로에게 한발자국 다가선...같은 학교를 졸업한지 삼십년을 훌쩍 넘은 중년의 우리는 그간의 여정이 너무도 다르지만, 둘다 아직도 조금은 불안한 영혼이라는 걸 인정하는 편이고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려 한다는, 닮은 결에 위안을 느끼며 발걸음을 함께 내딛었다.


그리고 며칠 후, 두 사람에게 에드워드 호퍼의 화집을 선물했다.

근래 얼마간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 들었던 내게 위로를 건네주던 그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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