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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일북클럽 Sep 02. 2020

공간 만들기

책 읽기 좋은 공간에 대하여 #2

좋은 공간이 주는 힘을 믿는 편이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황량하고 삭막하기 짝이 없는 먼지투성이의 폐허 같은 곳.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트렁크 하나만 들고 찾아온 야스민이 그곳을 청소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쓸모없이 쌓여 있는 물건들을 버리고, 필요한 물건은 제자리를 찾아 놓아두고, 고치고 다듬어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 무기력한 절망의 공간을 희망의 공간으로 변신시키는 작업. 

우리도 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버리는 것’이었다. 집안일을 최소화하는 편이라 애초에 일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사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도 정리하고 버릴 건 있었다. 중고마켓에 20여 년을 사용해 온 소파를 먼저 내놓았다. 싸게 내놓으니 금방 처분되었다. 독서모임을 위한 공간을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방의 침대도 없앴다. 버리고 없애는 쾌감이 상당했다. 그러고 나서 거실 벽 페인팅을 하기로 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가장 넓은 벽을 먼저 핸디코트로 칠했다. 망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두려웠지만, 한번 과감히 손으로 문지르고 나니 재밌기도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되어 자신감이 붙은 김에 복도로 이어지는 벽은 과감하게 밝은 주황빛으로 칠했다. 20년 넘게 생존하고 있는 빛바랜 에어컨은 짙은 남색으로 탈바꿈시켰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해 다양한 각도로 거실 사진을 찍으며 어디가 보완이 되면 좋을지 검토해보았다. 일단 제일 기초가 되는 벽이 해결이 되었으니 점점 늘어나고 있는 독서모임 멤버들이 모두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를 구입하고 배치하는 일이 그다음 순서였다. 


서치를 하면 할수록 선택의 폭이 너무 커져서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가격도 천차만별이고, 어떤 것을 포기하고 어디에 과감히 투자해야 할지 매번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소도시의 카페를 겸한 독립서점에 들르게 되었는데, 들어서자마자 그곳의 분위기에 확 빠져들었다. 책의 큐레이션은 말할 것도 없고 책장과 테이블, 의자, 조명, 식물, 음악 등 모든 요소가 책에 대한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편안하면서도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그곳만의 특별한 공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세상과 구분되는 그곳만의 속도. 무엇이 그렇게 만든 걸까. 무엇이 그곳을 다시 찾고 싶은 장소로 만드는 걸까. 찬찬히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아주 오래된 작은 상가건물의 1층을 개조한 그곳은 원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확 뜯어고쳐지지는 않았다. 기본 구조를 효율적으로 이용해서 책을 진열해 두는 곳,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거나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 주방과 카운터를 배치했다. 빈티지 가구와 맞춤 가구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각각의 가구나 소품이 개성이 있지만 서로를 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명과 음악, 식물들은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그 공간에 스며들어 있었다. 방문자들이 책 속에 온전히 빠져 있을 수 있게 한다는 공통의 목적에 다 같이 기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급조된 분위기는 아닐 것이다. 책방 주인의 오랜 기간 쌓인 취향과 책에 대한 고민이 만들어낸 풍경일 것이다. 


그곳을 다녀와서 어떤 기준이 세워졌다. 예쁘고 멋져서, 가성비가 좋아서, 실용적이어서 목록에 넣어둔 것들을 대부분 삭제했다. 비록 가정집이지만 현관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복도와 거실 공간에서 생활의 냄새를 가급적 없애고 싶었다. 평상시에는 가족이 밥을 먹고 요가를 하고 쉬는 공간이지만 언제든 순식간에 그 흔적을 지울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것을 기준으로 공간을 비워나가고 집 근처 목재소에서 합판을 잘라 와서 서가를 만들고 모이는 인원수에 따라 가용할 수 있는 벤치형 의자를 구했다. 기존의 식탁의자는 무료 나눔으로 없애고 그보다 공간을 덜 차지하지만 편안한 의자를 들여놓았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의 오랜 시간과 함께 해온, 집안의 어떤 물건보다 애정이 듬뿍 담긴 내 식탁을 없애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부모님이 사주셨던 어릴 적 내 피아노와 오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식탁, 어설프지만 우리가 만든 서가와 모아 온 아끼는 책들, 손자국이 그대로 남은 핸디코트로 칠해진 벽이 만들어낸 공간이 바그다드 카페처럼 희망의 공간이 되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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