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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일북클럽 May 04. 2016

여행이 뭐라고

남편과 작은 딸과 함께한 남미여행 이후

"그래서, 여행에서 뭘 느끼고 왔니?"

여행에서 돌아와 여행 얘기 좀 듣자며 호들갑스럽게 만나자던 친구들과 서둘러 몇 건의 약속을 잡았다.

예상대로, 평소와 다름없이 주로 화제를 이끌어가는 친구들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서로의 근황에 관한 수다가 쉼없이 이어지고, 얘깃거리가 떨어져갈 즈음 그제서야 생각이 났는지, 물어보는 똑같은 질문이다.

말문이 막힌다.

이어서 부럽다, 너니까 한다, 우린 절대 못한다. 사진으로도 그렇게 좋은데 실제로 가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등 감탄의 말들이 날아오고.

내 말문은 더 막히고 만다. 

친구들에게 적절히 가감하며 근사한 무용담을 멋지게 들려주리라는 야심찬 계획까지는 아니더라도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한 어조지만 뭔가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모험의 세계로 호기심어린 눈들을 끌어당기고 싶다는 욕심은 내심 가져봤는데.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 같아, '좋았어'라는 한마디도 쉽게 나오질 않는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다시 이야기를 주도하는 친구에게로 화제는 넘어가고, 쉴틈을 노려 그나마 가장 귀를 기울일만한 에피소드 하나만 슬며시 던져본다. 


헤어지고 나서야 나 자신에게 다시 묻는다.

'여행 후 너의 삶은 어떠니'라고.

망가진 몸뚱아리와 갚아야 할 카드청구서만 남았지, 라고 혼자 피식 웃으며 대답해본다.

그렇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간이기도 하고, 워낙 정반대편의 먼 곳이라서 아직은 신비로움이 남아있는 여행지이기에 지인들의 부러움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을 종종 받지만,

내 삶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먹고 사는 문제는 적어도 겉으로는 더 나빠졌고,

경비를 아끼는라 먹고 자는 곳도 편치 않고, 많이 짊어지고 많이 걸었기에 여행전부터 아팠던 오른쪽 어깨는 병원가기가 겁날 정도로 통증이 더 심해졌다. 

마음이 더 여유로워지지도 않았다.

더 큰 세상을 보고 왔으니, 마음의 크기도 더 넓어졌겠지라고 지레 짐작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만 돌려버린 관계들 속에서, 나를 합리화 하기 위한 변명의 말들을 (입밖으로 내진 못해도)  나 자신을 향해 되새김질 하고 있음은 여전하다.

중년의 나이에 육체적인 한계를 넘어선 듯해 보이는 모험을 했으니 더 대범해지고 용감해졌으리라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내가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과 실제로 문제해결을 해낼 수 있는 것과의 간극은 하늘과 땅차이라는 걸, 다시한번 뼈저리게 느꼈을 뿐이다. 

이보다 더 나빠지진 않겠지, 라는 가느다란 희망이 보기좋게 짓밟히며 더 나빠지기도 하고,

아, 정말 이대로 끝인가 보다, 라는 망연자실함 앞에 다른 길이 열리기도 한다.

진짜 운이 좋았어, 라고 한껏 들뜨게 만든 뜻하지 않은 행운뒤에 불운이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여행자의 삶에서 깨닫게 된 '살아내기 위한 나만의 필살기'는 이런거다.

지금 내 발등에 떨어진 문제부터 일단 해결하기. 그것에만 집중하고 온 힘을 다해 해결하느라 이런저런 잡생각이 끼어들 틈도, 타인의 시선에 나를 맞추느라 자신을 소모시킬 틈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 시달릴 틈도  없다는 것.

매 순간 닥치는 일들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떤 편견도, 편협된 가치관도 없기에 끊임없이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비교하며 자신을 갉아먹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여행생활자의 모습으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게,

넌 여행에서 뭘 느끼고 왔니,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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