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와 함께 안성에 있는 천년고찰인 칠장사에 다녀왔다. 이곳은 어사 박문수가 부처님을 찾아와 절을 올린 뒤,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다는 전설이 있는 절이다. 해마다 수험생들 가족들이 지성을 드리러 많이 찾아오기로 유명하다.
박문수가 건넜다는 다리 앞에 멈춰 섰다. 입구에 써 붙인 ‘합격 다리’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눈에 번쩍 뜨였다. 나는 다리 위에 올라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공손하게 합장했다. 어떠한 상황에도 아들이 실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내는 힘을 달라고 빌었다. 대웅전 법당으로 들어섰다. 뿌옇게 빛이 바랜 단청이 고풍스럽게도 유구한 역사를 그대로 말해주는 듯했다. 무릎을 꿇고 부처님의 자애로운 눈빛과 잠시 교감을 나눴다. 무엇을 하든 용기를 잃지 않게 해달라고 엎드려 절을 했다. 재도전하는 이번 시험에는 꼭 합격하게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기도했다.
두 손을 모으고 법당에서 나와 계단으로 막 내려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나, 예쁘기도 해라.”
한 무더기 노란 꽃이 너무나 소담스럽게 피었기 때문이다. 언뜻 꽃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잠시 머뭇거리는데 친구가 금잔화라 했다. 그 말을 듣고 고향 집 화단에 함초롬히 피어났던 꽃을 떠올렸다. 외할머니는 담벼락 옆으로 줄지어 피어난 꽃을 가리키며 ‘금잔화란다’라고 했었다.
인연 깊은 그 꽃을 보고도 얼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해 미안했다. 고향 집 화단에 있던 수많은 꽃들 중 나는 금잔화를 좋아했다. 앙증맞도록 작은 게 여느 꽃보다 빛깔은 강렬해서 금방 눈에 띄었다. 그런 꽃을 절에서 마주하다니 분명 행운일 거라 여겼다.
대학로를 지나다가 ‘메리골드’라는 뮤지컬을 한다는 홍보물을 받은 적이 있다. 메리골드는 꽃 이름으로서 금잔화와 매우 비슷하다. 같은 꽃으로 보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꽃이다.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워 호기심이 발동해서 관람했다.
줄거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죽음까지 가려는 사람들이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이야기다. 술로 세월을 보내는 기러기아빠와 1등을 강요당하는 여학생,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과 뚱뚱해서 외면당하는 처녀 모두가 주인공이다. 자살사이트 대표는 ‘내가 너희들의 자살에 기꺼이 도움을 줄게’라는 달콤한 유혹으로 사람들을 한 집에 집합시킨다. 하지만 대표는 자살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도록 관심을 쏟는다.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애착을 품을 수 있도록 상담을 해주는 은인 역할이였다.
가상으로 꾸며놓은 장례식장을 온통 메리골드로 화려하게 치장한 이유는 뭘까. 장례식에 쓰이는 조화(弔花)라면 당연히 국화가 아닌가. 손에 손을 잡은 출연자는 의아해하는 관객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친다.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여! 언제나 당신들 곁으로!”
알고 보니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란 다름 아닌 메리골드가 지닌 꽃말이었다. 행복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메리골드 꽃잎을 맞으며 주인공들은 ‘희망의 노래’를 열창한다. 제목과 잘 맞아떨어지는 주제라 감동이 몰려왔다. 나는 막이 내리고도 한참 동안 떨어지는 꽃잎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 뒤에도 꽃말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 책을 한번 찾아보았다. 꽃마다 사랑, 희생, 인내, 봉사와 같은 꽃말이 붙여졌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좋아하는 금잔화는 안타깝게도 ‘비탄’이라는 꽃말을 가졌다. 메리골드의 꽃말은 역시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었다. 이 꽃말을 뛰어넘을 만한 꽃이 어디에 또 있을까. 조금만 더 버텨내면 반드시 좋은 때가 온다며 삶에 희망을 주는 꽃이다.
나는 아들에게 한 송이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 화원을 찾았다. 화원 입구부터 빨강 노랑 갖가지 빛깔의 꽃들이 자태를 뽐내며 시선을 끌었다.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금잔화가 눈에 들어왔으나 외면할 수밖에. 아무리 금잔화를 좋아하기로서니 지금 당장 아들한테 필요한 것은 메리골드뿐이었다
노랑도 아니요, 주황도 아닌 황금색으로 곱게 빛나던 메리골드를 찾아냈다. 여러 겹의 주름진 꽃잎을 풍성하게 겹쳐 입고 한껏 멋을 부린 자태가 꽃말과 썩 잘 어울리는 듯 보였다. 배우들이 꽃을 흔들며 행복을 외치던 마지막 장면처럼 꽃송이 하나하나가 희망의 주인공처럼 반짝였다. 그중 가장 화려하게 단장한 화분 하나를 번쩍 집어 들었다.
누구든지 화단 한 곁에 메리골드 하나 심어놓고 잘 가꿔보라 말해주고 싶다. 땅 한 조각이 없으면 어떤가. 가슴 한편에라도 심어놓고 지극정성으로 가꾸면 되는 것을. 행복의 문으로 들어서는 날, 드디어 내 아들도 이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 있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