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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Feb 06. 2024

나는 바보 같은 엄마였다

바보 같은 엄마였어도 똑똑한 교사는 할 수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오늘 할 일을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운동장에서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실 문을 열고 창밖을 내려다봤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시간에 맞춰 '오케스트라 음악회' 공연이 한창 준비 중에 있었다. 무대는 붉은 카펫이 깔린 운동장.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일찍부터 관객으로 와서 빙 둘러 서 있다.      


학교 대표로 무대에 선 아이들의 표정이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오케스트라 단원을 이끄는 지휘자도 열정이 가득한 눈으로 단원들을 바라본다. 지휘에 따라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는 아이들의 눈빛에 진지함이 가득하다. 4학년부터 단원이 될 수 있는데 어린 나이에 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선 것 같아 참 대단해 보였다. 아이들 쉽게 접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을 여섯 곡 정도 연주했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열렬한 박수를 받는 연주자들은  얼마나 뿌듯할까. 한편으로 부러운 마음도 들면서 문득 딸아이가 생각났다.     


딸아이를 **여대부속초교로 입학시키려고 마음먹었다. 공립학교 교사인데 자식은 사립학교에 보낸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음악 쪽으로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꼭 그 학교에 보내 했다. 그 학교는 입학만 하면 각종 음악 관련 행사 참여 기회가 많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매년 가을마다 대학 강당에서 열리는 합창발표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우선 원서부터 제출했다. 예상대로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 학교 대강당에서 추첨이 있던 날 아침, 아이한테 예언했다. 너는 꼭 합격할 거라고. 남편과 친정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추첨에 참석했다. 지원한 가족 모두가 집합한 강당 분위기는 대학 합격자 발표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합격’ ‘불합격’이라 쓰인 구슬을 직접 뽑는 형식이었다. 아이들의 운명이 구슬을 집어 든 사람한테 달려 있었다. 불합격 구슬은 가족들한테 울음바다를 만들어 주었다. 남편은 안타깝게도 ‘불합격’ 구슬을 뽑았다. 입학은 물 건너갔고, 아이한테 헛꿈만 잔뜩 불어넣어 준 꼴이 되었다. 서로 껴안고 펄쩍펄쩍 뛰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한 가족들은 '합격'구슬을 뽑은 집이었다.

“서울대라도 붙은 것처럼 요란스럽더구나.”

못마땅했던 엄마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하신 말씀이다.     


만일 합격 구슬로 그 학교에 다녔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원하는 음악의 길을 가고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음악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영향이야 받았을 테다. 음악이라는 분야에 빠져 엄청난 성장의 기회를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해마다 열리는 발표회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행복한 얼굴을 했을까. 음악을 매개로 소통과 협동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사회성도 길러졌을 텐데.

 

하지만 아이는 불합격 딱지를 받았다. 그 사실은 아이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어주는 원인이 되었다. 나는 아이의 소질을 찾아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일찍부터 소질을 찾아 계발시키면 성공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나 보다. 음악의 기본인 피아노를 끊지 못하고 오랫동안 개인 교습까지 받은 것이 시초였다. 합창단원을 시키기 위해 합창 지도로 유명한 교사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감행하기도 했다. 합창단원이 되어 갖가지 학교 행사에서 찬조 공연하고, 세계 합창대회에 출전한 덕에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중학생이 된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가수가 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기획사도 기웃거려 봤다. 기획사 사장은 아이를 데리고 온 나와 남편을 번갈아 보더니 친절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가수가 되려면 열심히 공부하고 오세요. 그때는 받아 줄게요."

다행이었다. 기획사 사장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이를 데리고 오면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뒤 발성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서 여의도에 있는 한 음악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고작 제 외삼촌의 결혼식에 축가를 부를 정도였지, 음악인의 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막연한 길, 무계획적인 길을 걷는 동안 아이의 진로는 흐지부지 방향을 잃어갔다.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일이 어려워 여러 갈래 길에서 갈팡질팡 헤맸다. 아이가 원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야 했는데 아이의 손을 잡아끄는 역할만 한 것 같다. 그래서 딸아이의 20대는 행복하지 않았다. 가끔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얘기할 때 나는 자라목처럼 쏙 들어간다.     


나는 바보 엄마였다. 7살 어린 딸에게 너무 일찍 인생의 쓴맛을 안겨주었으니. 죄를 지어도 너무 큰 죄다. 그래서 아이에게 불어오는 바람도 내 탓인 것 같고, 아이가 흘리는 눈물방울도 모두 내가 지어낸 것 같다. 어디선가 ‘딸’이라는 말만 들려와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누가 ‘딸’이라고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또르륵 떨어진다.      


결핍을 겪어본 자만이 남의 어려운 사정을 아는 법이 아닌가. 딸은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두 개의 단체에 후원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돈에서 일정 금액을 매달 보내준다. 카페에서 차 마실 돈을 아껴 노숙자 센터를 찾고 서울역에 빵과 우유를 대기도 했다. 급하게 혈액을 구한다는 방송을 듣고는 일정 기간마다 헌혈까지 하는 아이다.

 

딸의 앞날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꿋꿋이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빈다. 모든 고난과 슬픔도 웃음으로 승화시킬 여유가 있기를 빈다. 나의 바람은 단 하나이다.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는 딸의 당당함을 보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다.     


멀리 캐나다에 있는 딸아이를 생각하며 잠깐 상념에 잠겼다. 음악회가 끝나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로 들어왔다. 하고 싶은 게 이미 정해져 있는 우리 반 아이들. 물론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고 싶은 일이 달라지기도 할 테지만.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읽어주는 교사로서 꿈을 향해 가는 그 길에 동반자가 되어주고 싶다.

나는 바보 같은 엄마였어도 똑똑한 교사는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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