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선여인 Jun 26. 2024

네 번째 결혼을 왜 하고 싶을까

결혼식장 순례기

  연둣빛 새싹이 초록으로 물들어가던 4월, 장미꽃잎 분분하던 5월은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이라는 결실을 보기에 아주 좋은 때다. 신랑 신부의 첫출발을 응원하기 위해 나도 주말마다 결혼식장을 순례하느라 바빴다. 부러움이 커서 그랬던가. 식장에 들어서면 내가 혼주라도 된 듯 샤르르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 살짝 웃는 표정으로 눌러야 했다.

 

순례 마지막 날 아침은 티 하나 없이 청명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황사와 미세먼지로 우중충하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빛을 띠었다. 결혼할 때 날씨가 좋으면 신부가 순하다는 속설이 있는데 믿을 만해 보였다. 순하디순한 친구의 딸도 엄마의 성품을 그대로 닮은 어린 천사로 보였다. 주인공이 첫 발걸음을 식장으로 내딛자 환한 빛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초록 잔디 위에 장식된 하얀 꽃들도 순결한 한 쌍의 행진을 축복했다. 야외에서 식이 진행되는 터라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는 하객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번졌다.


나는 신랑 신부의 만남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가 궁금했다. 물어보니 대학 신입생 때 만나 7년을 한결같이 사귀어왔다고 한다. 나의 예상은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고 딱 맞아떨어졌다. 십중팔구 어릴 적에 만나야 평생 배필로 맺어질 확률이 높다는 게 내 확신이다. 호감 가는 상대를 만나게 되더라도 나이가 많으면 섣불리 결혼에 다가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체를 부담스럽게 여겨 아예 연애만 하자는 쌍도 있다. 세상 물정 알기 이전에 사랑이 싹터야 비로소 결혼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게 나의 주먹구구식 통계 결과다.


결혼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스물다섯에 스물여섯 살인 한 남자와 선을 보았다.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그저 생각 없이 나간 자리였다. 결혼 상대자로서 내세운 딱 한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 줄 남자는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다. 철옹성처럼 단단한 고집, ‘첫 느낌’이 좋아야 한다는 게 나의 가장 큰 조건이었다. 그런데 절대 필수 조건인 ‘첫 느낌’에 부합되는 남자가 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나. 숙맥의 눈에 덜컥 콩깍지가 씌는 바람에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없이 인생의 중차대한 문제를 느낌으로만 결정한다는 게 얼마나 큰 모험인지 그때는 몰랐다. 좋은 쪽으로 보자면 순수했고, 냉정히 따지자면 철딱서니가 없던 때였다.


요즘 서른 넘은 젊은이들 눈에 콩깍지 씌어 결혼하는 예는 얼마나 될까. 감정표현의 일등 공신인 동시에 결혼의 일등 공신인 ‘콩깍지’라는 말 자체를 들어보기나 했을까. 대부분 나이가 있는 젊은이들은 현실적인 눈으로 세상을 여러 각도로 재고 계산하느라 쉽사리 감정에 기댈 기회가 적은 것 같다. 멋진 상대를 만나기 위해 기다려온 수많은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사랑에 눈이 멀거나 적당한 선에서 대충 눈 감고 결혼하는 경우가 점점 드물어지는 이유다. 오랜 기간 만났다가도 막상 결혼 앞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쉽게 헤어지는 짝들을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손만 몇 번 잡아도 결혼하는 법으로 알았던 나의 스무 살 시절 결혼 풍속도. 이제는 구시대 유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 듯하다.


독자 아니면 적은 형제 정도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길러진 요즘 세대는 양보 없이도 많은 것을 독차지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부모 세대보다 보고 듣고 배우는 것도 훨씬 많아 모두가 똑똑하고 지혜롭다. 이미 부모 세대보다 몇 배는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위기의 상황을 꿋꿋하게 헤쳐나갈 만한 참을성은 어떨까. 게다가 일에 대한 포부로 결혼과 육아보다는 자신의 꿈에 날개를 달고 싶은 열망이 더 큰 게 사실이다.


집에 앉아서도 다른 사람들의 결혼생활을 쉽게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경로가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기도 한다. 매스컴 또한 결혼이라는 제도를 마냥 두렵게 만들고, 속박하는 것으로 알게 하는 데에 영향을 준다. 결혼을 ‘지옥’으로 표현한다거나 ‘나 혼자 산다’라는 걸 화려하게 미화하는 프로가 그렇다. 더군다나 각종 육아 관련 프로는 긍정보다 거부감으로 작용하여 결혼 자체를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많이 알면 알수록 두렵기 때문에 주저함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서른과 마흔의 정중앙에 서 있는 아들이 결혼할 생각을 안 한다. 아들이 취직만 하면 결혼은 원 플러스 원처럼 따라오는 선물인 줄 알았던 것이 큰 오산이었다. 작년보다 나이 한 살이 보태졌을 뿐인데도 부모로서 느끼는 책임감은 엄청나다. 아들을 볼 때마다 슬슬 걱정거리로 작동한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으니 사랑의 결실을 위해서도 재촉 대신 느긋함이 낫겠다, 하고 위안하고는 있어도 손자를 손수 길러낸 친정엄마의 생각은 아니다. 부모가 되어 어쩌자고 태평하게 지켜보고만 있느냐며 매일 책망의 목소리가 드높다. 부모가 밀어붙이면 다 되었던 구시대에 사는 엄마를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도 문제이다.

  “시대가 천지개벽했어요. 지금은 손만 몇 번 잡고 결혼하던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요.”


문득 아침 신문 귀퉁이에 실린 미국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의 최근 일화가 떠오른다.

'또 영화를 찍었나?'

세계적인 배우인지라 기사를 한번 읽어보았다. ‘엘시나 카이로바’라는 러시아 사교계의 유명 인사와 결별했다는 내용이었다. 스물다섯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자고 매달렸는데 부담감이 든 여자 쪽에서 먼저 결별을 고해왔다는 거다. 세상에, 뜬금없이 결혼이라니 욕심이 과한 게 아닐까. 역시 우리네 보통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이미 세 번이나 결혼했던 사람이 왜 네 번째 결혼이 하고 싶었을까, 그 이유가 참 궁금하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선한 사람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