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는 노래를 불렀지
이제는 다른 것에 귀 기울여야 할 때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며칠이 안 되어 군대를 막 제대한 큰 시동생이 들어왔다. 부모님을 대신한 장남이 동생을 거두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라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2년 뒤 군대를 제대한 막내 시동생까지 들어와 삼 형제가 한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신혼 때 참 많이도 이사 다녔다. 첫 번째 다세대 집에 살 때는 한밤중에 도둑이 들었던 경험이 있다. 혼수로 해간 17인치 TV와 첫아이 돌 사진이 찍힌 캐논 카메라를 집어갔다. 늘 두려움을 안고 살다가 두 번째 도둑을 맞이하고 말았다. 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현관문이 열려 있고, 방은 아수라장이 된 게 아닌가. 농마다 서랍을 열어 헤쳐놨고, 다림질 판까지 찢어 속을 뒤집어 놓고 갔다. 기한을 채우지 못하고 이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 집에서도 옆집 담을 타고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도둑이 들어왔다. 게다가 갑자기 돈이 많은 주인으로 바뀌었는데 전세로 살던 집을 월세로 돌리겠단다. 만사 제치고 달려간 엄마가 통사정했다.
“산모가 몸 풀고 삼칠일이나 지난 후에 나가게 해 주세요.”
둘째 아이를 뱃속에 두고 마음을 턱 놓고 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집을 비우라는 통보를 해왔다. 날짜는 정확히 아이를 낳고 닷새 만이었다. 몸조리를 잘해야 할 시기에 이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어디로 가야 하나?’
현재는 다섯이지만 새로 가야 할 집은 여섯 명이 살아야 할 곳이지 않는가. 알뜰하게 돈을 모아도 턱없이 올라가는 전세가를 맞출 만한 집은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대식구가 들어갈 마땅한 집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근처에 분양하는 다세대가 있었으나 내가 가진 전세가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친정엄마는 고민 끝에 아껴서 모아둔 돈으로 그 다세대를 덜컥 사버렸다. 내가 직장 생활 편하게 하도록 아이 둘까지 봐주던 엄마의 결단에 나는 전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딸아이를 낳고 닷새 만에 간 그 집은 벽이 언제나 축축했고, 곰팡내가 났다. 참고 지내기에는 힘이 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자고 나면 몸이 퉁퉁 붓고 찌뿌둥한 게 병이 날 지경이었다. 업자를 불러 진단을 한 결과, 거실 바닥을 뜯어내야 한다고 했다. 날림으로 급하게 시공된 집이라 바닥은 온통 물바다에 지렁이까지 나왔다. 몸조리하느라 누워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속이 미어졌다. 산모도 산모지만 어린 두 아이가 아토피에 걸려 가려움에 시달렸다. 도둑이 들었던 예전의 집보다 더 정나미가 떨어졌으나 쉽사리 옮길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보일러 파이프를 수리하고 나서 오래도록 그 집에서 살았다.
몇 년 후, 큰 시동생은 부모님이 마련해 준 상계동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집들이하는 날에 가본 아파트는 눈이 부셨다. 탁 트인 거실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눈물 나게 부러웠다.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냈으나 가슴은 두 방망이질 쳐댔다. 하얀 커튼 자락을 살랑이던 바람이 가슴에 주체할 수 없는 풍랑을 일으켰다. 햇빛이 들지 않고 바람도 통하지 않는 비좁은 우리 집이 떠올랐지만 웃음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후, 부모님이 마련한 아파트에서 막내 시동생이 신혼살림을 시작할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어두침침한 다세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바로 옆집에 살던 친구가 평수를 늘려 큰 집으로 이사할 때도 크게 부러워하지는 않았던 내가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햇볕과 바람으로 식물이 잘 자라는 곳에 사는 동서들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부터 아파트를 노래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
끊임없이 아파트 노래를 부르던 어느 날,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집을 장만했다. 대출은 받았어도 우리 힘으로 마련하였기에 당당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얼굴 가득 퍼지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애썼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는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널따란 거실 한가운데 누워있는 것이 꿈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이방 저 방 뛰어다니며 숨바꼭질하는 아이를 찾아내는 것도 하나의 즐거운 놀이였다.
셋집이 아니라 내 맘대로 실내장식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새하얀 벽지로 도배하고 베란다 창에 격자무늬를 달아 운치를 주었다. 아이들을 위해 베란다에 화단과 연못을 만들어 금붕어도 길렀다. 천을 끊어다 커튼을 만드느라 재봉질을 하면서도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낮이면 햇살을 품을 수 있고, 바람에 빨래를 말릴 수 있어 신선했다. 이제는 곰팡내를 맡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냥 신바람 났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막내 시동생이 주식으로 빚더미에 앉는 바람에 불똥이 우리 집까지 튀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빚을 갚느라 사채까지 빌려 쓰더니 부모님이 사주신 아파트까지 날려버렸다. 부모님께 쉬쉬하느라 보증까지 선 남편이 그 이자를 내야 했다. 우리를 위해서는 써보지도 못한 돈을 밑 빠진 독에 언제까지 쏟아 부어야 할지 몰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집을 팔기로 작정했다. 산 것보다 몇천만 원이 밑지는 가격에 집이 팔리던 날, 마음은 허공으로 둥둥 떠다녔다. 오랜 시간 내 취향대로 꾸몄던 집을 고스란히 남한테 주고 나올 때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초가삼간에 누워도 방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담을 수만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낙원이다.’라고 책에는 쓰여 있었는데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길 건너편에 세를 얻고 약간의 돈이 남았는데 시동생을 위해 선뜻 내놓지 않았다. 아니 남편이 그것마저 홀딱 내놓으면 어쩌나 조바심이 났으니 마음을 비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가끔 맨 처음에 장만했던 그 큰집이 떠오르곤 한다. 널따란 거실 한가운데에 누워 아이들과 놀던 그때를 그리면 몽롱한 기분이 든다. 아파트 노래를 부르던 시절,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뎌왔는지 스스로 대견해질 때도 있다. 이제는 세월 따라 마음도 성숙해지고 비움에도 웬만큼 익숙해졌다. 부러운 것도, 욕심낼 것도 없는 나이다. 가족들 각자가 건강만 살뜰히 챙겨주었으면 하는 바람뿐.
지금 나는 노래를 부르는 대신 친정엄마가 매일 읊는 명심보감을 가슴에 새기는 중이다.
“욕심이 사나우면 화를 가져오게 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