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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Sep 01. 2024

전생에 축구 선수였을까

9월 5일을 기대하시라

  딩동딩동~


   누가 이 한밤중에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를까현관 시스템으로 살짝 엿보니 아파트 경비 아저씨다무슨 일로 꼭대기 우리 집까지 친히 납시었는지 놀라서 문을 열었다머리를 긁적이는 아저씨가 어렵사리 입을 뗀다.

"이런 얘기를 드리는 게 뭣하지만."

2103호가 너무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거다민원이 들어와서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당황했다난처한 표정을 짓는 얼굴에는 직업에 대한 고충이 엿보이는 듯하여 슬쩍 미안하기도 했다.

  

오늘은 다름 아닌 2026년 월드컵 진출을 위한 2차 예선 중국전이 있는 날. TV로 경기를 보며 응원하려니 목소리는 당연히 우렁찰 수밖에우리가 골을 넣을 듯 말 듯한 장면에서 폭발한 함성이 문제였나 보다손흥민 선수한테 슈팅 기회가 여러 번 왔음에도 불발로 그치는 순간이 많았다그때마다 단단한 시멘트벽과 천장을 뚫을 만큼 소리가 컸다는 건 숨기지 못할 진실이다.

  

아저씨를 마주하고 있자니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눈은 TV 화면에 꼭 박혀 있고 손은 애꿎은 문고리만 잡고 있었다젖 먹던 힘이라도 모아 응원에 쏟아부어도 모자랄 상황에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게 속상했다

  

그때 이강인 선수가 찬 공이 골대를 맞고 튕겨 나왔다몸은 움찔거리고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얼른 응원석으로 되돌아가 이 긴박한 경기를 승리로 이끌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러기 위해서는 얼른 꼬리를 내리며 죄송하다는 말로 부드럽게 헤어지는 게 상책나는 문을 닫고 들어오면서 투덜댔다.

  "오늘 같은 역사적인 날에 축구를 안 보는 집도 있나?"

  

하기야, 야구에 열광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무심하기는 마찬가지니 더 말해 무엇하리또 각자 다른 취미 생활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니까하지만 골이 들어가려는 순간에 입을 꼭 다물 수 있는 사람도 있을까터져 나오려는 함성을 틀어막자면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하는데입을 다물고 응원하면 어떻게 선수들한테 그 기가 전달되느냐고.


우리 집에는 점잖은 사람만 셋 있다크리스마스도 아닌데 날마다 고요한 밤거룩한 낮인 게 흠이라 365일 시끄러울 일이 없다게다가 셋 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터라 걸음걸이 또한 초싹댈 수가 없다천근만근 무거운 입을 가진 남편이 방정맞게 입을 놀리랴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들어오는 다 큰 아들이 뛰어다니랴아니면 나 혼자 멀뚱히 앉아 북 치고 장구 치느라 시끄러우랴그러니 층간 소음에 대한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을 만하다.


나는 지금껏 위층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도 언젠가는 그치겠지드륵드륵 긁는 소리가 나도 잠깐이면 멈추겠지이해하면서 살아왔는데축구 응원 하나 이해해 주지 못하면서 어찌 공동주택에서 살 생각을 했는지 축구 경기가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이런 날은 좀 봐주는 게 불문율이 아닐까.     


대한민국이 월드컵에 진출하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다축구광인 우리 가족으로서는 죽느냐사느냐가 걸린 중대한 경기다어젯밤 우리 가족은 무거운 입까지 열어 빅 매치에 내기까지 걸지 않았나몇 대 몇으로 승부가 갈릴까 예상 점수를 매겼는데 역시 하나같이 우리나라가 이긴다에 걸었다아침에 흩어졌다가 드디어 약속 시간이 되어 TV 앞에서 하나가 된 우리가슴 졸이며 경기에 몰입하던 중예상치 못한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들어왔으니 흥분된 기분이 한풀 꺾이고 말았다.


나는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주문했다화가 나겠지만 지금부터는 골인 장면에도 입 모양으로만 기쁨을 표현하자고항의 전화를 다시 받는다면 아저씨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하겠냐면서내 말에 아들 표정이 굳어졌지만 우리는 다시 축구 관전에 빠져들었다그때부터 최대한 소리를 안 지르려고 안간힘 쓰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됐다.


상대편이 우리 문전을 향해 슛을 해도 소리를 지르는 대신 몸을 뒤틀며 위로 솟구쳤다가는 소파 위로 다시 가라앉았다우리 편이 상대편 문전으로 드리블해서 달려갈 때나 우리 편 선수들이 패스를 놓칠 때도 아슬아슬한 감정을 소곤거림으로 대체해야 했다골을 빼앗겼을 때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으로 소리를 대신했다슈팅 찬스에도 소리를 지르려다 깜짝 놀라 손바닥으로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참다못한 남편이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우리 이러지 맙시다우러나오는 감정을 어떻게 억누르냐고."

아들 또한 옆에서 거든다.

"전화가 오면 오는 거고아저씨가 또 올라오면 올라오는 거지요."


우리는 서로의 눈짓에 기다렸다는 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입이 있어도 호부호형하지 못한 홍길동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했을꼬어휴이제야 숨통이 트이네바로 그때 이강인 선수가 멋지게 중거리 슛을 했는데 시원하게 골망을 갈랐다분명히 선수들한테 우리 가족의 열렬한 응원이 전달된 것 같았다거의 무승부로 끝나가는 마당에 얻은 천금 같은 점수였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거실을 방방 뛰었다잠깐 전의 다짐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로세 사람 중 가장 이성적이라고 하는 내가 제정신을 차리고 진정을 시켰다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1대 0으로 이기고는 있어도 안심할 상황은 아니어서 나는 더 좌불안석이었다가슴은 두 근 반 세 근 반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거려 양팔로 몸을 눌렀다아무리 애를 써봐도 한겨울 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덜덜거리는 몸을 말릴 수가 없었다만일 한 골을 허용한다면 1대 무승부가 되기에 잠시도 한눈팔 겨를이 없었다.


드디어 종료 신호가 울리자 바짝 오그라들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오늘의 승리에 우리 가족의 열렬한 응원이 영향을 미쳤다고 자부한다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준비를 서둘렀다입에는 다시 무거운 추를 달고 가볍지 않은 몸을 유지한 채층간 소음 없는 품위 있는 아파트 주민으로 되돌아간다.


새로운 감독의 배에 올라탄 선수들이 무사히 3차 예선전을 통과하여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르기를 기원한다선수들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 가족은 또 열심히 응원할 것이다민원 전화가 두렵기는 해도 본선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혹시 너그럽게 봐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목이 터져라외쳤던 2002년 월드컵 경기를 잊을 수가 없다가끔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앞을 지날 때면 온 국민이 한마음 되었던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자동차 경적을 울려대며 제일 큰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쳐대던 딸아이가 눈에 선하다본선 경기가 있는 날딸도 멀리에서나마 힘을 보태주었을 테다.


우리 가족은 전생에 축구 선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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