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온 거리가 넘실대는 봄 물결로 화사하다. 겨울 내내 회색이던 풍경화에 어느덧 연둣빛과 초록색이 칠해졌다. 따뜻한 입김에 기지개를 켜는 새싹들, 보기만 해도 기운이 솟는다. 한겨울 숨죽여 땅속에 양분을 저장해 놓고 깨어나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봄이 움트기를 기다린 건 나도 마찬가지다. 코끝을 간질이는 싱그러움에 이끌려 시장 구경하기 좋은 날을 택했다. 상인들 앞자락마다 수북하게 쌓여 내 눈길을 사로잡는 봄나물들. 머위나 가죽나물, 참나물 등 여러 가지 중에 유독 관심이 가는 건 방풍나물(防風)이다. '풍을 막아주는 나물'이라니 얼마나 대견하고 고마운지. 씹을수록 온몸으로 퍼지는 향긋함이 참 독특하다. 건강을 지키며 풍을 막아주는 비결이 그 향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중풍'이라고 생각해왔다. 한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절뚝거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풍을 맞았다.'는 말을 했다. 어제까지는 멀쩡했는데 '풍' 때문에 하루아침에 반신불수가 되다니. 내 몸을 자유롭게 놀릴 수 없다는 건 얼마나 서러운 일인가.
외할아버지도 오랫동안 중풍을 앓고 병석에 누워계셨다. 깊은 산중 외딴 초가집에서 할아버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동물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가 진동했다. 할아버지 방문을 열어본 나는 깜짝 놀랐다. 구부러진 한쪽 다리를 손으로 쥐어뜯더니 갑자기 주먹으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게 아닌가.
"도끼로 다리를 잘라내고 싶다."
얼마나 괴로우면 잘라버리고 싶다는 울분을 토해냈을까. 할아버지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은 마치 내눈에서 흐른 것처럼 아팠다. 그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을 중풍이라 여겼나보다.
하지만 중풍보다 훨씬 더 몹쓸 병이 내 앞에 나타났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코로나19이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며 서서히 종식되어 가고는 있지만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로 인해 우리 가족도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시름시름 앓으며 고통을 짊어진 아버지는 코로나의 최대 피해자다.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누워만 계신 아흔 살, 우리 아버지.
돌이켜보면 코로나 백신 3차 주사를 맞고부터 잘못된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아픔을 호소하기 시작한 시기와 딱 맞아떨어진다. 어깨로 시작해서 옆구리로 옮겨 다니는 통증은 몇 달간 지속되었다. 심장병으로 두 달에 한 번씩 외래진료를 가는 것 외에는 잔병치레가 없는 분이었는데.
전신 검사인 PET까지 해보았지만, 심장주치의는 통증에 대해서는 원인이 없다며 입을 다물었다. 운동이나 스트레칭을 하라고 했을 뿐. 심장은 아무 이상이 없었기에 잠을 잘못 주무셨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생긴 통증으로만 알았다.
급기야 척수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S종합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걱정하던 수술은 잘 되었다. 재활에 혼신 하기를 벼르며 병상이 나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병원에 갇혀 누워계실 줄 누가 알았을까. 5인 병실에 코로나가 급습했는데 아버지만 감염되었다. 1인실에서 열흘이나 격리되면서 보호자인 나도 푸른색 소독가운을 입고, 두꺼운 방독마스크와 위생 장갑을 껴야 했다.
죽음으로 내모는 지독한 코로나 기세에도 아버지는 끄떡없이 잘 버텨냈다. 흡인성 폐렴만 오지 않았더라면 재활을 끝내고 지금쯤 집에서 편안하게 엄마와 TV 시청을 즐기실 테다. 중환자실에서 수면상태로 있다가 깨어나자마자 다시 폐렴이 악화되어 목구멍에 구멍을 뚫고 말았다. 아버지는 지독하게 운이 안 좋은 초고령 환자였다.
숨을 쉬기 위해 뚫은 기관지 삽관은 아버지한테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갔다. 또한 입 대신 콧줄로 식사를 하는 비참함을 안겼다. 불과 며칠 사이로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는 운명이 되었으니 얼마나 황망한 결과인가. 아버지의 심정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코로나 백신만 맞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와 자책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노인재활병원으로 가라는 종합병원이 야속했지만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목구멍을 뚫은 환자는 응급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으니 집은 안 된다는 권고만 받았을 뿐이다. 다른 환자와는 달리 석션이 필요하고, 연하식 치료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야만 했다. 선택지가 지극히 좁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버지는 손이 많이 가는 아주 까다로운 환자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몇 달 전만 해도 나를 앞질러 성큼성큼 걷던 분이라 너무 가혹한 현실이다.
동네 노인재활병원에 입원하신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그나마 다행히 일주일에 한 번씩은 면회를 할 수 있다. 첫 번째 면회에서는 양손에 희망의 끈을 잡고, 엷은 미소를 지은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말씀은 못해도 손칠판에 적힌 아버지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일주일이 다르게 점점 의식이 무뎌지는 걸 느낀다. 종합병원에서 불리던 '귀여운 할아버지' 또는 '미소천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눈꼬리로 흘러내리던 눈물도 이제는 메말라 힘겨워 보인다. 삶에 대한 초점을 잃은 듯 무표정해진 아버지 얼굴을 쓰다듬는데 목이 멘다. 같이 간 남동생이 아버지 귀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자꾸 운동하셔야 해요. 저희가 아버지를 여기에 그냥 두지 않아요. 반드시 집으로 모실 거니까 걱정하지 마셔요. 그때까지 용기를 내서 꿋꿋하게 잘 견디셔야 해요."
아버지의 눈에 잠깐이나마 반짝 생기가 비쳤다. 이곳으로 모시기 전, 집으로 모실까도 고민했었기에 우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치의에게 물었다.
"집으로 모시고 싶은데 목을 뚫은 게 제약이라도 되나요?"
"이곳에서 편안하게 잘 지내시는데 왜 옮기려고요?"
불씨가 다 꺼진 장작처럼 겨우 숨만 쉬는 환자라는 걸 모를 리 없는 의사다. 팔다리를 억제제로 묶어놔 얌전하게 누워있으니 편안하게 보이나 보다. 근육이 빠져가는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 손 못 쓰는 아버지 심정을 알기나 할까. 평생 살던 집으로 돌아가 가족의 손길을 받는 것이 진정 편한 삶이 아닐까. '노인재활병원'이지만 재활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호전의 기미가 없어 보인다. 어떻게든 이 노인병원에서 아버지를 탈출시키고 싶은 마음뿐이다.
어제는 7회 차 면회를 가려고 준비하는 도중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환자분이 코로나에 걸리셨어요."
"네? 코로나에 걸린 적이 있는데 또 걸리셨다고요?"
면역도 생기지 않는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약을 과다 복용한 부작용으로 내성균이 발병해 격리실에 계신 상황인데 또다시 아버지를 덮치다니.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일주일에 한 번이나마 꺼져가는 의식에 자극을 드릴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해 갔다.
항생제와 항우울제, 수면제 복용에 코로나 치료약까지 처방되면 의식은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다. 약 주고 병주는 이 악조건에서 어떻게 헤어나야 할지 막막하다. 면회가 금지된 줄 모르는 아버지는 하염없이 우리를 기다리실 텐데.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를 걷듯 근심 속에 세월 보내는 엄마는 또 어찌 하나.
시장에서 사 온 방풍나물을 데치는데 아버지가 자꾸만 생각난다. 작년 이맘때쯤, 아버지는 파릇하게 데쳐 된장을 넣고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친 방풍나물을 맛있게 잡수셨다. 몇 해 동안 잡수신 방풍나물의 효과를 본 걸까. 언제나 넓은 보폭을 유지하며 힘 있게 걷던 아버지의 모습이 꿈결처럼 아련하다.
차라리 중풍이었다면. 절뚝거려도 괜찮아. 한 걸음이라도 뗄 수 있다는 건 축복일 테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코로나19, 바로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