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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May 21. 2023

'미소 천사'가 떠나셨어요

천상에서는 편안하시기를...

   

   코로나 감염으로 인해 3주간이나 금지되었던 면회가 해제되었다. 내일부터는 면회를 할 수 있다니 참말 다행이다. 그동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얼마나 우리를 보고 싶어 하셨을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아버지 생각에 코끝이 찡했다.

 

면회를 가면 달력부터 보여드려야겠다고 탁상 달력 하나를 챙겼다. S종합병원에 계셨을 때는 매일 날짜와 요일, 시간까지 따지며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셨는데 재활병원에 오면서부터는 많이 무뎌지셨다. 천장에 모빌을 달아 드려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진정성을 가지고 노인들을 돌본다는 지방의 N요양원에서 실시하는 특별한 방법인데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맹목적으로 허공만 바라보는 노인들한테 모빌의 움직임을 좇게 하여 인지력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발상이 신선했다. 우리 아버지한테는 어떤 모형의 모빌이 어울릴까? 잠시 인터넷을 뒤져보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지가 재활병원이었다.  

 

"아버지가 지금 위급한 상황이라 집중치료실로 내려가고 있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5층 격리실로 가신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일반 병실로 가지 못하는 마당에 집중치료실로 가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산소포화도가 80 밑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당장 내일 면회는 가능하냐고 물으니 괜찮다면서 전화가 뚝 끊겼다. 잠시 후에 병원장이 직접 전화를 해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버지의 상태가 생각보다 위급해서 우선 인공호흡기를 달았다고 한다. 오늘이라도 면회를 오면 좋겠다고 했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동생들과 긴밀히 연락하여 엄마와 함께 병원을 향해 달렸다. 오로지 걸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들어간 재활병원인데 과연 얼마나 성공적인 치료가 이루어졌는지 의문이다. 세균 감염이니 코로나 감염이니 하는 이유로 치료도 소홀해지고, 그 틈에 외부 자극마저 전혀 받지 못한 게 분명하다. 얼굴 보러 오는 사람 하나 없이 3주간이나 멍하게 누워계셨을 우리 아버지. 일주일에 한 번씩 얼굴 보며 이야기 듣는 최소한의 자극마저 금지된 3주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아버지가 불쌍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희가 금방 갈게요.'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신속항원 검사도 없이 바로 병실에 올라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계셨다.

  

"아버지, 아버지. 저희가 왔어요. 눈을 떠 보세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눈물바람이 된 엄마는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을 쏟아냈다. 귓가에 대고 큰소리를 치자 아버지는 겨우 실눈을 떴다가 금세 감아버렸다. 딸꾹질 비슷한 불안정한 호흡은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애타게 만들었다. 자식들 얼굴을 똑똑히 알아보고, 입 모양으로 또박또박 이름을 부르던 3주 전의 아버지는 안 보였다. 하고픈 말을 손칠판에 적으며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했던 아버지가 점점 스러져가고 있었다.

            -손 칠판에 쓰신 아버지의 마음-   


3주간이라는 시간 동안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전화했을 때는 그만그만하다고 했었는데. 기력은 좋으시냐, 의사 표현은 잘하시냐고 물을 때마다 좋다고 했었는데. 와서 보니 통화 내용과는 달리 기력은 물론 의식조차 정말 사그라져버리는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산소 포화도 수치는 70에서 80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대도 정신이 돌아올 기미는 안 보였다. 상체 힘이 좋고, 씨름을 할 정도로 팔 힘도 강했던 분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람 앞에 촛불 신세가 되어버렸다

   

당장이라도 운명하실 듯 위태로운 상황에 우리는 침대를 에워싸고 아버지를 지켜드렸다. 침통한 분위기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간호사와 간병사가 다른 환자들의 눈을 의식하더니 면회를 중단시켰다. 아버지를 혼자 놔두고 밖으로 나오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 입에서는 눈물과 함께 계속해서 한탄이 터져 나왔다.

   

"멀쩡한 집 놔두고 왜 여기서 외롭게 죽어가야 하느냐?"


앞으로 면회는 매일 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항상 대기하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다음 날도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면회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 아닌 슬픔이었다. 임종이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4개월간 아버지 곁을 지키던 막냇동생이 미국으로 돌아간 지 두 달 만에 다시 날아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와 울면서 아버지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의식이 있었는데 전혀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음날도 아버지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려고 보챘으나 가쁜 숨만 몰아 쉴 뿐, 의식이 없었다. 그 다음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수치가 떨어지고 있어 오늘을 못 넘길 것 같으니 빨리 오세요."

  

부리나케 병원에 도착하니 여전히 호흡을 힘들게 하셨고 역시 눈은 감고 계셨다. 그다음 날에도 아버지를 찾았으나 아무 호전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회생할 수 없는 아버지를 언제까지 외롭고 고독한 그 병원에 감금시켜 둘 수는 없다.'

   

집으로 모시는 게 최선이 아니겠냐고 했더니 마침 동생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한다면 위안이 되지 않을까 입을 모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원장한테 매달리며 애원했다.

  

"아버지를 저렇게 외롭고 고통스럽게 둘 수는 없어요. 며칠이라도 좋으니 집으로 모시고 싶어요."

"지금 아버님은 수면 마취체를 써서 편하게 숨 쉬고 계신 겁니다."

 

아버지가 왜 계속 눈을 감고 계셨는지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면 숨쉬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휴대용 인공호흡기를 달고 가면 되지 않겠냐며 물고 늘어졌지만 산소 용량이 적어 이동 중에 사고가 난다고 재차 말했다.  

  

"인공호흡기는 한 번 달면 법적인 허락 없이는 절대로 뗄 수가 없어요. 법으로 금지입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듣고 보니 인정으로 졸라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연명치료는 중단하고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치료만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최소한이란 영양제와 항생제만 투여하고 호흡이 힘들어지면 수면 마취제를 놓는 게 전부였다.

   

아버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천상으로 가시면 고통에서 해방이 될 수 있을까. 당당한 모습으로 두 달 전, 손칠판에 적어놓은 문구가 무색해졌다.

'간다 간다, 100세까지 간다.'

얼른 회복되셨더라면 아버지의 바람처럼 100세까지도 갈 수 있었을 텐데 원통한 일이었다.




S종합병원에서 가장 좋은 모습으로 계셨을 때 집으로 모셨더라면 하는 후회가 또다시 파도처럼 밀려온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버지를 일으켜 집으로 모셔와야 한다는 간절함이 점점 사라져 갔다. 대신 고통 없는 곳으로 하루빨리 보내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라고 생각했다. 무의식 상태에서 숨을 헐떡이는 고통을 지켜보는 우리들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잠에 빠져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아버지 얼굴이라도 쓰다듬어 보기 위해서. 불러도 아무 대답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몸 구석구석이라도 살펴보기 위해서.


위급 상황이 발생한 지난 일요일부터 시작해서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전 11시 36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혈압이 떨어지고, 산소포화도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으니 빨리 오세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병실에 들어섰다. 사방이 커튼으로 둘러쳐져 분위기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

"아버지!"

    

기계음이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과 단단하게 연결되었던 인공호흡기가 이미 분리된 상태였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그토록 힘겹게 달고 있던 목관과 콧줄이 없어져 잘 생긴 아버지 얼굴이 돋보였다. 콧줄과 목에 붙은 관을 떼어냈으니 마음껏 잡수시고, 자유롭게 말씀하실  텐데 이미 늦었다. 발그스름하게 핏기가 돌던 어제 본 얼굴은 뽀얗게 분을 칠한 듯 창백했다. 정갈한 얼굴, 반듯한 자세가 마치 숨을 쉬는 듯했지만 허황된 바람인 걸 무엇하나. 거추장스럽게 매달려 있던 관이 빠진 목에는 하얀 거즈가 덮였다. 바짝 말려들어간 혀가 보이지 않도록 커다란 거즈가 입을 가려주었다.

 

"아버지, 이제 가래 뽑느라 얼굴 찡그리지 않아도 되고, 고통스러운 숨도 없으니 편안하신가요?"


배설 기능이 원활하지 않아 퉁퉁 부어오른 손을 어루만졌다. 거짓말처럼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 인생 끄트머리에 와 생각지도 않게 찾아든 힘든 삶에 결국 마침표를 찍은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다. 아버지! 이렇게 허망하게 삶을 놓아버릴 것을 왜 그토록 힘겹게 사셨나요.


6개월 하고 열흘 동안 병상 생활을 하며 화를 내거나 짜증 내지 않았던 착한 환자, 우리 아버지. 간호사들은 아버지를 '귀여운 할아버지', '미소 천사 할아버지'로 불렀다. 많이 아프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괴로웠을 텐데도 핀잔 한번 없이 간병하는 자식들의 요구에 잘 응해주셨다. 우리가 조금 더 지혜를 모았더라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했더라면 아버지의 생을 조금이나마 연장시킬 수 있었지 싶어 자책이 든다.


이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 알았다면 무조건 집으로 모시고 오는 건데. 이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다면 고통을 덜어드린다는 이유로 인공호흡기에 언제까지 의지할 거냐고 떼쓰지 않았을 텐데. 너무나 죄송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 편안하기를 바라며 서둘러 가신지도 모르겠다.



   

이승에서 고생 많이 하다 가신 아버지. 우리를 잘 키워주고, 앞날을 내다보며 살아갈 바탕까지 마련해 주고 떠나신 아버지. 지금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커다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엄마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께 못다 한 효도는 엄마한테 드릴게요. 고통 없는 천상에 가시거든 걱정 근심 내려놓고, 자식들 걱정하지 말고 편안하게 지내시길 바랄게요. 어떻게 사시는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면 잘 계시다면서 미소 한번 지어주세요.

아버지,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저희와 함께해주셔서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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