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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Jun 22. 2023

장롱 속에 웅크린 만 달러

장미꽃잎 분분하던 5월에

  

  미국에서 부리나케 날아온 동생은 손에 만 달러를 쥐고 있었다. 아버지의 쾌유를 빌면서 준비해 온 두툼한 돈 봉투 머리맡에 놓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막내딸이 온 것을 아시기나 할까. 눈도 뜨지 않고 아무런 대꾸 없이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울다 울다 어깨가 땅바닥까지 축 늘어진 동생은 입 벌린 아버지의 얼굴만 무심히 어루만졌다.

"아버지, 빨리 일어나서 이 돈을 쓰셔야죠."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가며 돈을 모 아버지는 쓰는 걸 두려워했다. 꼭 써야 할 곳에는 경제성부터 따지며 한참을 골똘해야 했다. 엄마한테 주는 돈 너무 적어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에게게. 그까짓 것으로 뭘 할 수 있다고요?"

하마터면 '언제 쓰시려고요? 무덤에 가져가시려고요?'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비교적 여유를 즐길 만했던 말년에도 여전히 인색한 옷벗어던지지 못했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은 내가 꽃을 가꾸기 시작하고부터다. 나는 화단에 점점 불어나는 꽃을 보는 기쁨 배고픔도 잊다. 불어나는 통장을 들여다보는 재미에 푹 빠진 아버지. 통장은 고생했던 지난날의 보상이 아니었을까. 분명히 정서적인 안정과 여유 함께 안겨 주었을 것이다. 꽃을 심고 가꾸면서 여유를 찾고 심신의 안정을 꾀하고 있는 나처럼 말이다.


아흔 구비 긴 터널을 온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아버지는 그저 무탈할 줄 알았다.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끄트머리에 다달아 엄청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줄을. 성큼성큼 걷던 다리에 힘이 빠지더니 주저앉는 횟수가 거듭되었다. 척수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할 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제자리로 돌아오실 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진스러운 미소를 잃지 않던 아버지는 침상에 누워서도 맨손체조를 하며 고통을 이겨냈다. 나무토막처럼 가늘어진 다리를 내려다보는 눈가에 물기가 돌았지만 움직여보려고 무던히 애썼다. 욕창만 생기지 않았다면, 코로나19에 감염되지만 않았다면 이토록 맥없이 이울지는 않았으리라. 점점 스러져가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절망도 뒤를 빠짝 따라붙었다.

  

비록 커다란 선행은 베풀지 못했지만 남의 것이라면 털끝만치도 욕심내지 않았다.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마음이 여려 빌려준 돈을 떼이거나 사기를 당하도 속으로만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소하나마 공덕을 인정받았면 천상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았을까. 생각할수록 아쉽기만 하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떼어내지 못한 '금식' 표는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버렸다. 목을 뚫어 콧줄로 묽은 죽을 연명하는 처지 그저도 몰인정하게 앗아가 버렸으니 얼마나 이 맺혔을까.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아침을 여는 엄마는 오늘도 슬픔을 노래한다.

"떠나는 순간까지 밥 한 술 못 먹여 보낸 게 가슴에 맺혀."

  

선천적으로 베풀기 좋아하는 엄마가 아버지한테 푸념을 한 적이 있다. 남자라면 베짱이 두둑해야 하는데, 손에 틀어쥐기만 좋아한다고. 얇은 지갑은 아끼는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은 성격으로 굳어져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을 게다. 앙금처럼 고였던 크고 작은 미움제  와 돌이켜보니 그리움이라고 울먹인다. 60년 넘도록 함께한 짝을 잃은 그 허전함을 슨 수로 달랴.

 

아버지는 병원비가 자동 결제되도록 카드를 등록해 두셨다. 금쪽만큼 귀히 여기던 아버지의 돈이 주말마다 뭉텅뭉텅 빠져나갔다. 아버지의 절약이 없었더라면 병원비에 대해 고심하느라 우리 오 남매는 매일 머리를 맞댔을지 모른다. 병원비 대느라 허리가 휜 가족들의 불화에 대해서도 익히 들어개가 숙여진다.

 

아버지가 천상으로 가던 날은 사방천지에 장미꽃잎 분분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눈이 부셨고, 세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얼굴에는 편안함이 깃들었다. 구차하게 매달렸던 산소호흡기와 콧줄, 기관지 관을 훌훌 벗어던진 아버지는 비로소 홀가분해 보였다.


"아버지, 근심 걱정 내려놓고 그곳에서는 오로지 아버지만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해요."


성큼성큼 걸어 나올 아버지를 기다리는지 장롱 속으로 들어간 만 달러는 아직도 잔뜩 웅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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