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에서 온 초대장

나의 농장이여, 조금만 기다려주길

by 조선여인

‘당첨되었습니다.’

휴대전화 화면에 뜬 짧은 문장에 하마터면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작년에는 신청을 늦게 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기회를 놓쳤다. 이번에는 나의 민첩한 행동이 가상했던지 행운의 여신이 내 손을 잡아준 모양이었다. 주말농장에 당첨됐다는 초대장을 보니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고 가슴이 두근댔다.

분양 대금 입금 기간이 단 사흘뿐이라 송금부터 서둘렀다. 다섯 평 분양에 십이만 원, 기간은 올 4월부터 11월까지이다. 기존 회원이 우선 신청권이 있어 빈자리가 생겨야 신입 회원에게 기회가 돌아오는 구조다. 이렇게 나한테 기회가 온 걸 보면 누군가 양보한 사람이 있었다는 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분이지만 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한 것만 같아 그분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 주말농장에 관심이 생긴 건 작년, 지인의 초대로 이 농장을 구경한 날부터다. 차를 타고 부천 근처의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니, 먼지가 폴폴 날리는 숲 뒤로 시골에서나 맡을 수 있는 흙냄새가 풍겼다. 산으로 올라가기 직전까지 들판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토록 넓게 펼쳐진 밭을 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사이좋게 나뉜 조그마한 땅에 어쩌면 그리도 각양각색의 농작물이 재배되고 있는지 경이로웠다. 채소들의 자라나는 모습에 주인의 성품과 정성까지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찬찬히 둘러보니 수도 시설이 가까이 있어 수시로 물을 줄 수 있고, 평상도 군데군데 놓여 있어서 가족끼리 정다운 시간을 보내기에 좋을 것 같아 마음이 더 끌렸다.


주말농장은 어느 문중의 종중땅인데 이웃과 함께 풍요를 나누기 위해 분양하는 거였다. 개발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땅 주인은 어떤 분일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밭과 인접한 곳에서 산으로도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완벽한 조건이었다. 그곳을 다녀온 후, 작은 공간마다 초록을 뽐내던 너른 밭이 오래도록 눈에 밟혔다.


주말농장을 하고 싶다니까 주변에서는 펄쩍 뛰며 말리는 사람들도 있다. 사 먹는 게 훨씬 싸다, 귀찮아서 어떻게 다니냐는 이유에서였다. 나의 마음을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돈을 아끼려고 주말 농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내 손으로 심은 작은 씨앗이 초록 생명의 싹을 틔워 준다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시골 태생인 내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되새기며 건강한 먹거리를 일구는 기쁨, 그것 하나면 대만족이다.


내가 이토록 농장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히 흙이 그리워서만은 아니었다. 사실 주말농장을 향한 나의 동경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시가 주최한 ‘자연으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서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난 게 계기였다. 자연의 품을 느낄 만한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자연을 사랑하는 눈을 키울 수 있었다. 이 모임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맹추 농장’을 방문하는 거였다. 맹추라니? 우스꽝스러운 이름에서 보잘 게 없는 농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맹추농장을 견학하는 날은 아침부터 보슬비가 촉촉이 내렸다. 자유로를 따라 도심의 큰길을 달리다가 경기도로 빠지는 좁다란 길로 꺾어 숲길을 곧장 달렸다. 조금 못 가서 거짓말처럼 너른 벌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입을 벌려 탄성을 질러댔다. 벌판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비밀 요새처럼 아담한 농장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밭의 고랑 사이마다 무성하게 자라난 잡풀이었다. 마치 일부러 재배해 놓은 것처럼 온갖 잡풀이 올라와 있었다. 전문적인 농부들이 봤더라면 아마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몰랐다.

‘아, 이 사람아. 밭에 풀을 심은 건가, 농작물을 심을 건가?’


본격적으로 밭을 일구기 전, 주인장의 짧은 강의를 먼저 들었다. 농장을 마련한 계기는 각종 화학비료로 인해 우리의 토양이 심각하게 오염되는 가운데 원시적 농법을 구사하기 위해서였다. 공간, 함께할 사람, 농사법 이 세 가지를 고민하여 만들었기에 평범한 농장과는 달라 보였다. 화학비료 대신 직접 퇴비를 만들어 쓰고, 잡초조차도 작물로 여기는 재배법을 고수했다. 주인장은 수확량에 연연하지 않고 무농약을 고집하며 토지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분이었다. 규모는 작아도 우리 땅을 지킨다는 그의 자부심에서 비로소 ‘맹추’라는 말의 숨은 뜻을 깨달았다.


우리는 앞치마를 두르고 커다란 장화를 신은 채 농부 흉내를 내며 밭으로 나갔다. 밭으로 들어서자 연녹색의 풀들이 땅 위로 고개를 내밀며 낯선 방문객들을 환영했다. 농막에서 틀어놓은 잔잔한 음악과 간간이 내리는 보슬비가 멋진 조화를 이뤄 운치가 흘렀다. 이 모든 것들이 작물의 성장을 위해 든든한 영양소가 되어 줄 거라고 믿었다.


밭에서 호미질하고, 풀을 뜯어보니 하나하나가 어여쁘고 사랑스러웠다. 상식이 부족하여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줄 수 없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풀이 자라고, 그 풀들이 모두 먹거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놀라며 우리는 그날 직접 채취한 것들로 ‘잡초 부침개’를 부쳐 먹었다. 하찮게 여기던 잡초의 고소한 반전에 우리는 기운이 나는 듯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잡초를 예찬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맹추농장 문을 나서면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주변의 온갖 유혹이나 질시에도 흔들리지 말고 무농약 재배를 끝까지 지켜달라고. 우리 토양의 순화를 위한 계몽운동도 해주었으면 하는 욕심도 내보았다. ‘맹추 농장’만의 특색을 살려 굳건하게 지켜지기를 바라며 농장에 대한 동경의 씨앗을 마음에 품고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나는 주말농장 당첨 소식에 환호했다. 드디어 그 동경의 씨앗을 틔울 채비가 시작됐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다섯 평이라는 작지만 거대한 땅을 경영할 권리가 내게도 주어졌다. 어떤 작물을 심어야 할지, 어떻게 재배해야 할지 미리 공부부터 해놔야겠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양육법을 제대로 알고 길러야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소중한 내 땅을 잘 가꾸어 우리 집 식탁은 물론 이웃의 식탁도 건강하게 채워주고 싶다.


이제 그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4월 1일, 주말농장 시작’이라는 기록을 남기자. 나의 농장이여, 조금만 기다려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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