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눈부시게 빛날 수 있기를

by 조선여인

작년 한 해, 6학년 교실에서 국어 강사로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시를 소개하고 글쓰기와 책 읽기를 독려할 수 있어서 보람되었다. 글쓰기에도 관심을 가지라는 뜻에서 중학교에 올라가면 독후감 대회나 글쓰기 공모전에 도전해 보기를 권유했다. 최고 학년인 만큼 특별한 관심을 쏟았던 그 시간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학년 끝자락, 12월 마지막 국어 수업의 주제는 '퇴고'였다. 수업 마무리 단계에서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퇴고'를 가르칠 수 있다는 건 가슴 뛰는 일이었다. 평소에 우스갯소리로 '퇴고만이 살길'이라 부르짖고 다녔기에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초고는 '퇴고'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빛날 수 있는 거야.”

'퇴고'와 함께 글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합평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합평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글을 갈고닦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마음속으로 나의 글방을 떠올렸다.

내가 몸담은 글방에는 강의라는 게 특별히 없다. 일주일마다 만나 각자 써온 작품을 발표하고 회원들 간에 평을 나누는 것이 전부다. 구성이 좋은지, 문장의 호응은 자연스러운지 글을 해부하며 의견을 나누다 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간혹 띄어쓰기나 오탈자를 지적하느라 시간을 뺏기면, 컴퓨터 맞춤법 검사기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 아쉬울 때도 있다. 정해진 시간 안에 글의 뼈대를 살피는 데에만 집중해도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합평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내 글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비평'의 장이다. 하지만 합평을 잘못을 잡아내는 '비판'으로 오해하는 분도 있어서 늘 조심스럽다. 한 번은 시로 등단한 분이 작품을 써와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연을 서로 맞바꾸면 훨씬 이미지가 탄탄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분이라 나의 어설픈 조언이 자칫 그분의 기분을 언짢게 할지도 몰라서였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모두가 작품에 대한 솔직한 피드백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작품을 합평할 때 사람마다 중점을 두는 면이 있겠으나 나는 이야기의 구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낱말이나 문장을 세세하게 따지기보다는 작가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문단의 짜임을 본다. 낱말과 문장은 주관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하고, 문단의 흐름은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다. 기승전결이 잘 되었거나 수미상관법이 맞아떨어진다면 안정감 있어 좋다. 글쓰기 관련 책을 읽어보는 요즘은, 구성만큼 문장의 묘사 부분도 많은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글을 쓰다 막히면 잠시 컴퓨터에서 떨어져 딴청을 부리다가, 다시 모니터 앞에 앉는다. 번쩍하고 찾아오는 영감은 없고 머리를 쥐어짜거나 비틀어야 겨우 실마리가 보일 때면 타고나지 못한 글재주가 아쉽다. 끝났다 싶은데도 끙끙대며 고치고 또 고친다. 퇴고를 거듭해도 만족할 만한 글을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고된 과정을 거쳐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비로소 인쇄에 들어간다. 하지만 퇴고의 끝은 끝이 아니다. 글방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나의 원고는 퇴고의 칼춤을 추는 걸까. 발표 직전까지도 미완인 채 주춤하는 원고 앞에서 나는 오늘도 진화하는 중이라며 긍정 웃음을 날린다. 낭독을 마치면, 회원들의 쓴소리를 받아 적을 자세를 갖추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제발 입에 발린 칭찬은 거두어 주소서.’


이것은 빼라, 저것은 첨가해라, 이 부분은 완전히 삭제하는 게 좋겠다 등의 조언이 날아들면 시간 내서 공부하러 온 게 헛되지 않아 뿌듯하다. 내 글이 관심받았다는 증거 아닌가. 원고 위에 빨간 볼펜 자국이 많을수록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가볍다. 그렇다고 조언을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다. 내 주관대로 취사 선택하면 그만이지 언짢아할 이유가 전혀 없다. 모두 나의 성장을 돕기 위해 마음 써주는 문우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만약 “고칠 게 없네요”라는 말을 듣는 날은 공친 기분이 든다. 며칠간 씨름하던 글을 어렵게 선보였으면 가타부타 평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문장조차 '이렇게 썼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되는 게 독자의 마음인데, 내 글에 고칠 부분이 없다니. 혹시 내 글이 관심 밖으로 내몰렸나 해서 서운함마저 든다.


내가 믿고 있는 이런 퇴고에 대한 뚝심을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주고 싶었다. 사실 아이들은 한 번 쓴 글을 다시 볼 시간이 부족하다. 전문 작가도 아닐뿐더러 수업 시간에 쓴 짧은 글이지만, 글쓰기의 기본인 '퇴고'에 대한 호기심만큼은 심어주고 싶었다. 나는 헤밍웨이, 톨스토이 등 위대한 작가들이 퇴고를 어떻게 정의했는지 큰소리로 읽어주었다. 글을 다듬는 즐거움이 어떤 맛인지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생님도 글이 다 된 듯해서 글방에 가져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해줄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걸까? 아이들이 내 입만 쳐다봤다.
"여러 사람의 머리를 합하면, 완성된 듯한 원고도 한순간에 너덜너덜해지고 만단다."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증거를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가방 안을 뒤져 며칠 전에 빨간 볼펜으로 난도질당했던 원고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줄 그어진 문장, 동그라미 쳐진 낱말, 교체된 문단 표시로 지저분해진 종이를 본 아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날 아이들은 조별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자신의 작품을 1차 퇴고했다. 친구들끼리 원고를 돌려 읽으면서 2차 퇴고에도 진심을 쏟았다. 빨간 펜으로 친구의 글에 정성껏 조언을 적어주던 모습은, 내 마지막 국어 수업을 풍요롭게 장식해 주는 듯했다. 퇴고만이 살길이라고 부르짖던 나의 진심이 아이들한테도 스며든 것 같아 기쁜 날이었다.

나는 교문을 나서며, 아이들의 ‘퇴고’가 중학교에 가서 눈부시게 빛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퇴고' 동기 유발 자료>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부분을 서른아홉 번이나 고치고 나서야 만족했다."
나보코프: "글이 한 번에 유려하게 써지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내가 발표한 모든 글은 고쳐 썼다."
톨스토이: "나는 고쳐쓰기를 좋아하고, 그냥 저절로 나온 글은 믿지 않는다, 그게 나의 방식이다. <전쟁과 평화>는 인쇄하기 직전까지 고쳐 썼다."
엘윈 브룩스 화이트 동화작가: "위대한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위대한 고쳐쓰기만 존재할 뿐이다."
이태준 소설가: "고칠수록 좋아지는 것은 글쓰기의 진리다. 이 진리를 버리거나 숨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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