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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Aug 28. 2023

저, 자랑 좀 해도 될까요

암기의 달인을 소개합니다

저기요, 제가 자랑 좀 해도 될까요?

자식 자랑은 아니니까 팔불출이라는 말로 놀리실 필요는 없어요.


올해로 팔십구 세가 된 을해생 이경원 여사님을 자랑합니다.  

이 분으로 말씀드리자면 충남 서산에 있는  '산수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이분이 유일하게 본인 입으로 자랑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산수리 마을의 수많은 처녀들 중 미모로는 이인자였다는데 직접 확인할 수는 없겠지요? 학교 문 앞에는 가보지도 못한 분이지만 언제나 향학열이 불타오르지요. 배움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어서 양보하거나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어요.

 

이분의 자랑거리야 수도 없이 많지만 남들이 절대로 따라올 수 없는 게 하나 있어요. 암기를 아주 잘한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아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아주 높아요. 암기의 명수라고 해야 할까, 달인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이경원 여사가 암기하는 것을 잠깐 듣고 있노라면 혀가 내둘러지면서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와요. 단순히 몇 자 정도를 외우는 게 아닌 책 한 권을 통째로 머리에 담아두니까요. 화들짝 놀란 사람들의 확장된 동공을 보고 있노라면 저는 자랑스럽기만 하답니다. 살짝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저의 엄마시거든요.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하곤 해요.

"그 나이에 외운 것을 어떻게 안 잊어버리지?"

사람들의 탄복에 저는 손부터 내저어요. '잊어버리지 않는 것'에 놀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떻게 외울 수가 있느냐.'에 방점을 두어야 할 문제라고요. 오히려 이렇게 묻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아니, 인간의 뇌로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외울 수가 있지?"

맞아요. 여든아홉인데 어떻게 글자 한 톨도 틀리거나 막히지 않고 모조리 줄줄 외울 수가 있는지. 자식인 제가 봐도 놀랍다니까요. 그 머리를 제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가끔 상상해 봅니다.

  

제 취향 상 딱 질색인 드라마 종류가 있어요. 시공이 뒤섞여서 과거와 현재를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 드라마이지요. 사람의 혼을 빼놓고 머리를 뒤죽박죽 만들어버리는 그런 드라마 말이에요. 엄마가 어느 순간 벼락을 맞고 과거로 회귀해서 도깨비방망이를 하나 얻어가지고 현대로 나왔을까? 그 도깨비방망이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뒤부터 갑자기 천재가 된 것이 아닐까? 판타지 드라마가 따로 없어요. 세상의 문자라는 문자는 깡그리 다 외우게 되었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엄마의 암기 능력은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겠죠.   


두뇌회전이 빠르고 결단력이 있으며 지혜롭다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섭외를 받아 출연시켜드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이니 대충 짐작이 가시겠지요?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이렇게 글로나마 공유를 하고자 합니다.


천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안 틀리고 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천자문이라 함은 한자로 된 천 글자를 말하잖아요. 음독만 1000자이지, 훈까지 읽자면 5000자는 족히 넘어갈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천지현황우주……'식으로 외웠을 때가 1000자이지, '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루황, 집우, 집주……'식으로 하면 외워야 할 음이 훨씬 더 많아지잖아요. 수 천 글자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술술 외워나갈 때는 마치 신들린 사람 같다니까요.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우는 것은 고사하고, 책을 보고 일사천리로 술술 읽어 내려가기란 쉽지 않지요.


60 갑자를 순서에 맞게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외우는 사람도 아마 드물 거예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10자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2자를 조합하면 60 갑자가 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요.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경오, 신미, 임신, 계유……임술, 계해' 박자에 맞춰서 외울 때에는 긴 호흡에도 꼬임 한 번 없이 술술 나온답니다.


엄마 별명은 '걸어 다니는 한자 사전'이에요. 한자어 하나하나마다 뜻과 음을 모두 꿰고 있어 모르는 한자가 거의 없을 정도예요. 무슨 글자든지 물어보면 척척 대답해 주시거든요. 한자어는 어렸을 때 공부한 게 아니고, 자식들 모두 출가시키고 나서, 일흔을 넘긴 나이부터 아버지랑 재미 삼아 시작했던 공부이거든요. 한자는 음이 같아도 뜻이 다른 글자가 수도 없이 많잖아요. 예을 들면 '가'라는 글자를 알아보자면 '옳을 가' '거짓 가' '아름다울 가' '집 가' '값어치 가' '더할 가' 등 끝도 없지요. 그 많은 글자를 모두 꿰고 있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랍니다. 나중에는 대학 나온 아버지 실력이 무학 출신인 엄마를 못 당할 정도까지 되었지요.    


아버지의 49 재 하는 날, 목탁을 두드리며 천수경을 외는 스님 앞에는 책이 놓여 있었어요.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읊는데 엄마도 목탁 소리를 타고 불경을 외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스님과 버금가는 수준이라는 걸 보고 다시 한번 놀랐요. 천수경이나 반야심경까지 모조리 외울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스님 앞에는 책이 놓여 있었지만 엄마 앞에는 종이쪽지 한 장이 놓여있지 않았어요. 어찌 책도 없이 스님과 목소리를 딱딱 맞추었을까 그게 참 신기해요. 그밖에 또 외우는 것이 몇 개는 더 있어요.


제가 어렸을 적에 엄마는 이런 말을 곧잘 하셨어요.

"내가 국민학교만 다녔어도 지금쯤 장관은 해 먹었을 거다."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스마트 폰 사용법을 알려드렸더니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카톡으로 자유롭게 통화를 할 수 있어요. 이제는 유튜브에서 나오는 좋은 글귀를 날마다 듣는 답니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시사와 상식에도 뛰어나셔요. 그만큼 이해력이 뛰어나고 총기가 출중하다는 뜻이지요. 일상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하고도 대화를 척척 이어나갈 수 있거든요. 그 바탕에는 기본적으로 긍정마인드와 상대방 배려심이 깔려 있어서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나이가 들면 만사 귀찮고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눕는 것만 좋아한다고 하잖아요. 호기심 많은 엄마는 뭐든지 포기하지 않고 알려고 노력해요. 어렸을 적에 집에서 방아 찧는 일만 시키지 말고 학교를 보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물론 공부를 막았다고 해서 그저 일만 하면서 무식쟁이로 살 수는 없었답니다.


학교 가는 것은 막았지만 한학 하는 할아버지 덕에 어깨너머로 한자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지요. 일하면서, 매일 할아버지 시중을 들면서도 귀로는 한시를 주워 담았기에 어깨너머로 한자 공부 많이 하셨나 봐요. 하고자 하는 열의만 있다면 누가 무슨 수로 막겠어요.


우리 오 남매는 지금 엄마를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계획을 짜고 있어요. 오매불망 학교만 다니면 소원이 없겠다는 엄마의 원을 이제라도 이루어드리려고요. 알고 보니 나이는 많아도 갈 수 있는 학교가 있었던 거예요. 세상에는 정규학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젊은 사람만 다니는 학교만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에 나이가 많다고 차별받아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니까요.


엄마는 신체장애로 4급 판정을 받았으니 다행히 데이케어센터에 다닐 수 있었어요. 데이케어센터를 우리는 '노치원'이라고 부른답니다. 어린아이들이 다니는 치원처럼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어요. 학교에 입학하여 얼마나 잘 적응할지, 사람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평소 인성대로 남에게 양보 잘하고, 남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상대의 웬만한 잘못은 눈감아 주고, 가르치는 선생님을 공경할 줄 안다면 아마도 날마다 즐거운 학교생활이 될 거예요. 학교폭력 같은 것은 절대로 안 일어날 것으로 확신해요.


우리 이경원 여사님!

꿈에도 그리던 학교 입학,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학교에 다닐 수 있기를 저희 모두는 열심히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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