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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Dec 06. 2023

나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어떤 나이를 알고 싶으신가요?

                      

  오래도록 불치병을 앓아왔다. 발병 시기는 아마 사십 대 후반부터 시작된 듯싶다. 병의 증세에 코웃음을 치던 사람들과는 달리 남편은 치료에 도움을 주려고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차도가 없자 지금은 아예 포기해 버린 눈치다. 나도 별다른 처방 없이 오늘날까지 잘 버텨온 편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듯 조바심을 누그러뜨리고 나니 마음은 오히려 태연하다.


평소 나는 나이를 밝힐 때 두 갈래로 구분 지어 말하는 습관이 있다. 그중 하나는 일상적인 나이, 즉 호적 나이라 할 수 있겠다. 나머지 하나는 결코 홀히 해서안 될 중요한 정신 나이가 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밑바닥에 깔린 호기심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스무 살이라 해도 좋다. 어린애들이 좋아 주위 눈치 볼 것 없이 함께 놀아줄 때는 철딱서니 없는 십 대 같다는 말도 듣는다. 몸에 완전히 익지 않아 어설퍼 보이는 칼질 솜씨는 삼사십 대 초보 주부로 안성맞춤이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마음 주머니가 차츰 넓어다고 느면 오십 대라 해도 어울릴 테다. 여기저기 아파서 병원 출입이 잦아지는 걸 보면 이미 육십 대를 훌쩍 넘어 거 같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우렁찬 심박동 소리와 함께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아침을 다. 머리는 희끗희끗한데 마음은 사춘기 소녀처럼 두근대고 있으니 그 괴리감을 어쩌랴. 호적 나이는 해가 갈수록 올라가는데 정신 나이는 왜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지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이도 더러 있으니 참 고마우면서도 지당한 말씀이다.


나이에 혼선을 빚는 날이 반복되어 정확한 내 나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게 내 병명이다. 병의 증세는 옷을 사러 갈 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부인복 매장의 점잖은 정장 옷이 손짓하지만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신호등을 살피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결국 숙녀복 매장의 문고리를 잡고 만다. 매장 안으로 슬그머니 발을 들이밀기까지는 일단 성공한다.

‘이 많은 옷 중에 설마 나를 위한 옷이 없을까 봐?’


눈에 쏙 들어온 옷을 번쩍 집어 들 때까지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 눈치코치라고는 아예 조금도 었던 여자처럼. 몸에 옷을 걸치는 게 아니라 옷에 몸을 집어넣는 시도를 몇 번이나 하고 나면 맥이 탁 풀린다. 이럴 때는 사방을 의식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젊은이를 위한 허리 잘록한 옷이 퉁퉁한 아줌마 몸에 가당키나 한가. 엉덩이 한가운데에서 걸린 옷이 옴짝달싹 하지 으면 당황하는 기색을 들키게 된다. 어렵사리 옷을 벗어내는 과정을 주욱 지켜보던 점원이 가시 눈초리 보낸다. 묻지도 않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이유는 그냥 나오기 멋쩍어서다.

“요즘 옷들은 왜 이렇게 작게 나오지?”

허탕치고 나오는 내 뒤통수는 이미 뜨끈하다. 젊은이들 틈에 끼 부조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나오는 꼴이라니.


나는 오랫동안 절대 아줌마가 아니라는 주문을 외우며 살아왔다.

‘몸매만 그렇지. 주름살이 좀 있어서 그렇지. 젊은이만 못할 게 뭐람?’

이런 탓에 누가 옆에서 아줌마라 불러도 듣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나는 절대 아줌마가 아니라는 착각을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증세가 이쯤 되면 중증환자로 분리되어 치료 불가능한 단계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 불치병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우연히 무시루떡을 먹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순식간에 뚝딱 해치워버린 게 아닌가. 목구멍을 타고 아주 부드럽게 넘어가면서 감칠맛까지 안겨 준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는 평소 고두밥처럼 된 것만 좋아해서 물기 있거나 진 음식은 딱 질색이다. 어려서부터 외할머니가 만들어 준 팥시루떡을 좋아했으나 무가 들어간 무시루떡은 질척거려서 절대 먹지 않았다. 물컹거리는 을 맛나게 잡수시는 할머니조차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국 없이 밥을 먹던 내가 언제부턴가 국물을 찾기 시작한 것 같다. 아이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아무리 외쳐봐야 육체는 이미 호적 나이로 기울었다는 증거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아무리 우겨봐도 인간의 생리현상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피해 갈 수는 없다. 나이를 뿌리치려 애를 써봤자 온몸으로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오고 만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정신 나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지나는 길에 누군가가 내 나이를 물어왔으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그러면 나는 되물을 것이다.

“어떤  나이를 알고 싶으신가요?”

“그야, 물론 정신 나이지요.”

이렇게 말하며 크게 웃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불치병에는 약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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