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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시 Dec 09. 2018

시간에 쫓기는 삶, 일찍 일어나기

수필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새벽까지 깨어서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익숙해졌던 나는 주변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면서도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늘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에는 언제나 시간이 모자랐다. 자연스럽게 잠을 줄이게 된 나는 보통 하루 6시간을 겨우 자고 일어나 일을 하고는 했다. 나는 아직 학생이고 내게 일이라고는 공부가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늘 공부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텐데 왜 시간이 모자르고 공부조차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는지 스스로에게 종종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시간에 발목을 잡힌 것 같은 삶, 언제까지나 계속되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우리는 왜 시간에 쫓기는가


시간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놓고 나는 종종 철학적으로 고민하고는 했다. 누구나 공평하게 가지는 것, 담아둘 수 없는 것, 미리 쓸 수 없는 것 - 시간은 우리들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힘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시간은 우리에게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가하지 않는다. 거꾸로 다루기에 따라 우리는 시간을 자유롭게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다. 이른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에서 우리들은 시간이야말로 최고의 상품이 될 수 있음을 처절하게 느끼며 살고 있다. 예컨대 이동통신분야에서 3G에서 LTE(혹은 4G)로의 전환이라든지, 버스를 타지 않고 택시를 탄다든지, 정식발매를 기다리지 못해 배송대행을 통해 해외직접구매를 시도하는 것이라든지, 모두 시간과 돈을 맞바꾸는 행위에 해당한다.시간은 모두가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어떠한 가치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매개로 작동하는 시장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다.


한편 의욕을 상실한 사람, 계획이 없는 사람, 일이 없는 사람, 무언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 등은 이 시간의 압박을 정반대로 받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것도 없지만 시간을 강제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은 더 큰 자괴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물론 이 사실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현대사회에서는 원하는 만큼 잠을 자고 원하는 만큼 먹고 마시며 무슨 일이든 시간의 제약 없이 '편하게' 하자는 사회적 풍조가 만연하며 젊은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는 '꿈'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이런 생각과 부질없는 희망을 품는 것조차도 그들이 현재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고 있기에 느끼는 감정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쉬는 것은, 다시 말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고민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지금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지불한 기회비용이다. 얼마든지 지금의 삶을 포기함으로써 그것들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삶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일상을 포기해야 한다. 하루쯤, 길게 일주일쯤 아니면 심지어 한달쯤 쉬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정상'적인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손뼘으로나마 재보며 어림짐작하는 순간 더 큰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되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바라보는 순간 지레 겁만 먹을 수 밖에.


역사는 선택되어 기록된 시간의 조각들이다


종종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다. 지나간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나아갈 동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옳은 충고는 아닐 것이다. 나는 누구나 그렇듯이 내가 살아온 삶이 후회로 가득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몇번이고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그 선택은 때때로 마치 참과 거짓처럼, 흑과 백처럼 우리들의 성공과 실패를 날카롭게 재단하고는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 또한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실패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나의 성격 탓인지, 나는 한번도 내가 실패했다고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았다. 혹자는 결국 정신승리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나는 내가 언제나 스스로가 꺼낼 수 있는 최선의 카드를 골랐다고 자부한다. 언제나 묵직하고 과감한 결정들을 통해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했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 역시 자신에 대한 신뢰와 용기로 걸어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이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을 매개로 누군가 나에게 명령할 때 나는 그 압박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시간에 맞추어 일을 처리한다. 이는 때때로 나쁜 습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야 할 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평가나 판단을 완강히 거부한다. 시간에 대한 주권을 되찾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또 그 역할의 중함은 어느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것은 내 사고에 의하면 내 시간표에 맞추어 해야 할 일을 적절한 시기에 처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간은 계속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인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역사는 연속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선택되어 기록된 시간의 조각들이다. 나는 그렇기에 역사와 시간을 분리해 인식한다. 역사는 시간의 조합이지만 불특정 순간을 무작위로 선택해 조합한다고 하여 역사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역사는 일상적이고 평탄한 시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하루에 몇번 화장실에 갔고 손을 씻기는 했는지 밥은 몇시마다 먹었는지 전혀 모른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자 노력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 동안 그가 뭘 하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역사가들이 그가 하루에 몇번 화장실을 갔는지 기록하지 않았다면 이는 그들에 의하면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객관적일 수 없다. 역사가 객관적이라면 이는 이미 역사가 아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숨을 쉬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삶을 요약해 자기소개를 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단순히 태어나고 언제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언제 대학교를 졸업했는지 따위의 분명한 항목에 이끌려 삶을 요약하고 정리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요구되는 상황은 대부분 시간의 흐름이 아닌 역사적으로 재구성된 삶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경험한 서로 다른 사건들이 결국 우리가 다른 이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핵심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언제 초등학교에 들어갔는지 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무엇을 꿈꾸었는지, 대학교를 졸업할 때 어떤 목표를 가졌는지 등이 우리를 타인과 구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25살 남짓의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 인생 역시 그렇게 재구성될 여지를 남겨놓고 살아보려 했다. 즉, 이 인생은 나의 것이며 타인과 확실히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 나 자신다운 결정과 고민들로 가득 채워져야 했다. 쉽게 말해 내 삶은 그저 연속된 시간의 흐름이 아닌 누군가의 펜으로 기록될 역사가 되어야 했다. 숨을 일생동안 몇번 내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조용한 밤, 방 한켠에 앉아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의 숨소리를 듣게 된다. 혹은 나처럼 비염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입으로 숨을 쉬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매번 의식하고는 한다. 살아있다는 것 만큼이나 값진 것이 없으며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이미 충분히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생각하는 것보다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누군가가 정해준 목표가 아닌 자신의 설계도를 충실히 따라 살면서, 시간조차도 정복하고 그 위에 올라선 순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나름 아름다운 인생이었다는 것을.


일찍 일어나기


나는 시간에 쫓기는 삶을 해결하기 위해 오래 자지 않는 습관을 들였지만 이것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나름의 실천을 시작했는데, 무작정 일찍 일어나보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면 그 만큼 일찍 잠들게 되며, 마치 하루의 길이가 달라진 것 같은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아직 잠드는 시간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 앞 공원을 가볍게 걷다보니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 추운 날씨에도 마음만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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